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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6495
한자 昌原會原縣城址
이칭/별칭 자산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 산17-1임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안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8년 12월 23일연표보기 - 창원 회원현성지 경상남도 기념물 제88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창원 회원현성지 경상남도 기념물 재지정
현 소재지 창원 회원현성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 산17-1임 지도보기
성격 성터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에 있는 포곡식 토성.

[개설]

창원 회원현성지자산산성이라고도 불린다. 1988년과 2004년에 2차례 실시된 발굴 조사의 결과 회원현성은 고려 초에 이미 축조되었다고 추정되며, 폐성 시기는 『경상도 속찬 지리지(慶尙道續纘地理誌)』에서 1430년(세종 12)에 석축으로 축조하였다는 기사를 참고한다면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 이전으로 추정된다. 1988년 12월 23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창원 회원현성지두척산 남쪽 기슭에 돌출한 구릉과 서남쪽 계곡을 두른 포곡식 토성으로 평면 형태는 남북을 장축으로 한 장타원형이다.

[변천]

회원현성의 축조 시기는 전체적인 유물 출토 양상을 고려할 때 적어도 고려 시대 초로 추정된다. 출토된 명문 기와에 새겨진 ‘정풍 이년 정축(正豊二年丁丑)’이라는 명문은 1157년(의종 11)에 해당한다. 또한 의춘현은 의령의 별칭으로 1018년(현종 9)에 강양군[진주]의 속현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참고한다면 적어도 11세기 이전에 회원현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기와들이 1차 성벽과 2차 성벽에서 확인되는 것을 감안하면 초축 시기는 좀 더 올라갈 수 있다. 이 성의 폐성 시기는 회원현성에 설치되었던 절도사영이 현재의 합성동으로 옮겨가는 것이 1387년(우왕 4)이고, 『경상도 속찬 지리지』에서 1430년(세종 12)에 돌로 축조하였다는 기사를 참고한다면,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이미 회원현성이 폐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치]

창원 회원현성지두척산 남쪽 기슭에 돌출한 높이 143.8m의 낮은 구릉 서남쪽 계곡을 두르고 있다. 이곳은 현재 마산만과 떨어져 있으나 초축 당시에는 마산만과 인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현황]

창원 회원현성지 내부의 창원시 시립 마산 박물관 일대를 지나 남쪽으로 연결되는 동벽은 박물관 남쪽을 관통하는 도로 개설로 인해 일부만 남아 있고, 도로 구간을 제외하면 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의 사면을 지나서 몽고정 뒤쪽까지 성벽이 잔존한다. 현성의 규모는 정상부를 기준으로 약 620m이고, 시립 박물관 앞 도로 아래 잔존하는 성벽이 약 150m임을 감안할 때 회원현성의 규모는 700~800m 정도로 추정된다.

회원현성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은 최소 2차례 이상 개축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성벽의 기단 석축부에서 석축렬이 총 3차례 확인되는데 이 가운데 초축 성벽의 기단은 기반암을 정지한 후 흑갈색 점토로 바닥을 덮고 지대석[지댓돌] 없이 수직으로 3단 이상 석축하였다.

1차 수축 기단은 최하단에 세장방형으로 다듬은 지대석을 놓고 그 다음에 안으로 10~15㎝ 가량 물러나 성석을 놓고 2~3단으로 축조하였다. 2차 수축 기단은 기존의 판축 성벽이 붕괴된 지점을 정지하고 그 위에 1단의 할석[깬 돌]을 이용하여 기단부를 구성하였다. 이 중 1·2차 수축부는 모두 비스듬한 직선 방향으로 축조되었다. 내벽에는 4m 간격으로 나무 기둥을 설치하고 각 구간마다 내벽에 덧대어 체성과 직교한 석축을 쌓아 축조 구분점 및 체성부의 붕괴를 방지하는 시설을 설치했다.

외벽에서도 내벽과 마찬가지로 4m 간격을 두고 나무 기둥의 흔적이 발견됨에 따라 판축 구간이 4m 간격임을 알 수 있다. 회원현성 내벽에 겉쌓기한 석축에서는 초축과 증축 성벽의 축조 구분점이 확인되며, 4m 간격으로 조성된 나무 기둥은 2단으로 나뉘어졌으며 그 길이가 대략 1~1.5m이다. 또 초축과 증축 시 나무 기둥을 받치거나 둘러싼 석재와 4m 구간마다 성벽과 직교하게 축조된 내벽의 석렬에서도 상하의 축조 시기 차이가 확인되고 있다.

회원현성 내부에서는 건물지의 일부로 추정되는 석축 시설이 동벽 내벽에서 확인되었는데, 여기에서 명문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또 북쪽 정상부에는 남향으로 폭 25~30㎝, 길이 220㎝의 배수 시설을 구비한 약 330㎝의 석축 시설이 남아 있다. 이 건물지는 장대나 사당으로 추정된다. 내벽 조사 구간에서는 ‘U’자 형태 단면의 내황(內隍)[성벽으로 흘러드는 물을 차단하는 구조물]이 확인되었고, 북벽과 북문지 주변에서 외황(外隍)[성벽에 둘러진 해자]의 흔적이 확인되어 내황과 외황을 모두 갖춘 성곽이라 할 수 있다.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기와로서 평기와는 생선뼈무늬가 주류를 이루며, 문살무늬, 인동무늬[忍冬文], 능형무늬[菱形文], 차륜무늬[車輪文], 사선무늬[斜線文] 등이 복합된 복합문 기와가 다수이다. 그 밖에 부분적으로 선조무늬[線條文]와 선조 복합문, 민무늬도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회원현성회원현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마산만과 인접하여 축성되었다. 회원현성과 유사한 형태의 토성들, 즉 바닷가나 강안에 인접한 형태의 토성들은 통일 신라 시대에 집중적으로 축조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 토성은 치소를 포함하거나 치소 인접한 곳에 축조된 치소성과 치소와 떨어져 해안이나 강안을 조망하기 유리한 지점에 축조된 성들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토성들은 왜구 및 해적들은 방어하려는 의도와 해로를 통제함으로써 세수의 안정적인 확보에 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통일 신라 시대의 항해술은 연안 항해·근해 항해였으므로 해로와 인접한 곳의 축성은 해로를 적극적으로 통제하려는 의도의 표출이며, 이와 더불어 강안에 축성된 성곽 역시 강을 이용한 수로 교통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 신라 시대 이후 해안이나 강안에 축조된 성곽들이 어떠한 형태로 이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 초기에 시행된 조운제의 12조창 중 통양창이 사천 선진리 토성에, 해룡창이 순천 홍내동 토성에 설치되었다. 이와 달리 통일 신라 시대의 토성이 축조되지 않은 마산 지역에 석두창이 설치되었는데, 공교롭게 고려 초기에 회원현성이 축조되었다. 고려 시대 조운제는 통일 신라 시대 바닷가에 축조된 토성을 최대한 활용하였고, 토성이 없던 지역에는 새로 토성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회원현성은 고려 초기부터 시행된 조운제의 준비와 시행 과정, 통일 신라와 고려 초기의 지방 지배와 왜구 방비와 관련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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