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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7028
한자 朴魯一
이칭/별칭 일문(一文), 송암(松岩)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형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4년 10월 11일연표보기 - 박노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박노일 경남 함안 장날 만세운동 참가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함안 장날 만세운동 발발
몰년 시기/일시 1963년 12월 28일연표보기 - 박노일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8년 - 박노일 대통령 표창 수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 - 박노일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박노일 출생지 - 경상남도 창원시
묘소 박노일 묘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경남도의원

[정의]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노일(朴魯一)[1894~1963]은 1919년 3월 19일 경남 함안 장날 대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함안 장날의 만세 운동은 조한휘, 한종순, 이찬영, 조병흠, 박건영, 강기수, 한관렬 등이 계획하고 대산면(代山面)의 한문 교사인 안지호와 연락하여 3월 19일 함안 장날에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고 3월 19일 봉성동(鳳城洞)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오후 2시,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경찰 주재소로 향했다. 이때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마산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이에 격노한 시위 군중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시위 군중은 폐쇄한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 군수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 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였다. 오후 5시, 시위대는 마산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 포병 대대와 대치하다 그들의 무자비한 탄압에 해산되고 말았다. 이때 체포되었으나 곧 탈주하여 6년 동안 피신하였다가 통영에서 체포되어 마산 형무소에서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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