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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8077
한자 馬山場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지명/시설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동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장시

[정의]

1700년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형성된 경상도의 최대 장시.

[개설]

『만기요람』에는 마산장을 경상도의 최대 장시(場市)로 기록했다. 1899년에 마산포가 개항장으로 지정되자 기존 시가지[舊馬山] 남쪽 신마산(新馬山) 지역에 각국의 영사관 부지와 공동 조계(租界) 등이 들어서 도시가 급속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창원 감리서가 폐지되고 마산 이사청(理事廳)이 설치되었으며, 마산과 삼랑진을 연결하는 군용 철도인 마산선이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내륙과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종래의 마산부 지역 중에서 각국 거류지와 외서면 지역을 마산부로 정하고, 나머지 지역은 창원군·진해군에 소속시켰다. 1949년의 시제 실시에 따라 마산시로 바뀌었다. 마산은 1960년 부정 선거에 대한 격렬한 시위, 1970년 한국 최초의 수출 자유 지역 설치, 1973년과 1977년의 고속도로 개통, 1980년 부마사태 등 개항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과정이 응축되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변천]

마산장은 창원의 서쪽 마산포에 자리잡고 있던 항구도시였다. 마산포장은 『만기요람』에서 15대 시장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마산장이 18세기 이래 급속하게 발전한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1765년 마산포마산창이 설치되고 이곳에서 경상도 8개 군현의 조세를 집결시켰다가 한양으로 운반하면서 이곳이 상품 유통의 거점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동북 해안지역과 남해안 지역의 상품유통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조선 후기 마산장[어시장]은 음력 5·15·25일에는 샛강[현 오동동 어시장 부근]에서, 음력 10·20·30일에는 구강[산호동 용마산]에서 정기적으로 장이 열렸다. 쌀, 보리, 콩, 조, 면화, 어류, 마포, 모시, 비단, 종이, 유기, 소, 과실, 연료, 호초석 등 다양한 물목이 매우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마산장의 규모는 매우 커서 1800년대 말 마산 선창의 객주가 130여 호였으며, 1890년에는 어물과 곡물을 실은 수 백 척의 상선이 출입하여 해안에 빈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8세기 이후 상업 도시로 성장한 마산장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구가 5,000~6,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마산장을 통해 유통되던 상품들은 소, 면포, 마포, 면화, 명주, 명주실 등을 비롯하여 종이, 갓, 망건, 도자기, 해삼, 명태 등이었다. 이와 같은 상품들은 경상도 남해안 일대의 각 군현에서 생산되던 것으로 마산포조창이 설치되면서 이곳이 물화 집사지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번성한 마산장은 함경도 덕원의 원산장, 충청도 은진의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후기 15대 장시 중의 하나로 발전하면서 마산을 남해안 최대의 상업도시로 변모시켰다. 당시 마산 인구가 7,898명으로 창원부의 다른 면의 인구보다 대략 1,800~3,500명 많을 정도였다. 창원에는 마산포 외에도 지이포, 사화포, 합포, 여음포가 있었지만, 수 천 척의 정박 가능한 마산포가 중심 포구로서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해상 유통의 중심 포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마산포의 시장권은 마산창의 관할 구역이었던, 창원, 함안, 칠원, 거제, 진해, 웅천, 의령 동북면, 고성 동남면이었다. 이들 지역의 곡물과 기장, 울산, 평해, 강릉, 영해, 함흥 등지의 어물과 마포가 유통되었다.

특히 원산포에 집하된 북어가 마산포를 경유하여 충청도 은진 강경포까지 유통된 것을 볼 때 마산포가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중개포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산포 외에도 동래의 부산포, 김해의 칠성포가 경상도의 해상유통 중심지였다.

하지만 마산포는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중개포구 뿐만 아니라 낙동강 수운과 영남 남해안과 호남 서해안을 연결하는 중심지였기 때문에 대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산포가 남해안 일대의 상품유통 중심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이곳에는 상품의 매매를 중개하고 위탁판매도 하며 매점업에 종사하는 여객주인들과 물화중인들이 크게 증가했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각종 주인들의 수입은 수천, 수만냥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세력이 있는 토호배들이 뇌물로 서울의 고관들을 매수하여 주인 임명장을 얻어가지고 이권을 독점했다. 이러한 가운데 헌종 대 『일성록』의 기록에는 선상주인들 중에 여성들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성]

마산창이 설치된 이후 창원 부사가 조창에 관원과 조군을 배치하고 선창 주변에 마을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시장[마산장]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마산장에서는 어민들이 어획한 각종 수산물을 비롯해 농산물, 옷감, 유기그릇 등이 거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1899년 마산포가 개항되면서 외국의 공산품들이 들어와 시장 활성화와 함께 마산 경제를 지탱하는 근간이 됐다.

『만기요람』에 마산포의 객주[현재 수산업 협동조합 기능과 유사]가 130호나 됐다는 기록으로 미뤄 당시 구마산 어시장이 상당히 번창한 것으로 짐작된다. 조창을 중심으로 한 어시장은 마산항 매립과 함께 현 위치인 동서동 합포로~해안로 사이와 수협주변으로 확장된다.

[참고문헌]
  • 문화 콘텐츠 닷컴(http://www.culturecontent.com/ma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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