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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 공중 욕탕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10026
한자 馬山-公衆浴湯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영주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공중목욕탕에 얽힌 일화.

[내용]

1940년대 인구 2만 명이 넘지 못한 신구 마산 지역에는 공중목욕탕이 성업하였다. 대표적으로 신마산 일본인 거주지의 불노탕(不老湯), 앵탕(櫻湯), 구마산의 상반탕(常盤湯), 명호탕(鳴戶湯)이 있었으며, 오동동에 조선인이 경영하던 곳이 있었다.

1960년대에는 오처탕, 오동동 입구 오동탕, 그리고 청락탕 자리에 웅천 사람이 경영하던 조일탕, 남성동 매립지의 소금탕, 현 철도 PX 근처 일본인이 경영하던 곳, 철도 합숙과 기관구에 직원용의 큰 욕탕이 있었다.

당시 공동목욕탕의 입욕료는 대인 5전, 소아는 3전~1전 5리로, 1개월을 약정하고 고 매일하는 목욕 사람에게는 1원 5전으로 할인하여 주었다.

1970년대 지금 마산 지역에만 30여 개가 넘는 공중목욕탕이 있었다. 따라서 목욕시설이 미비한 인근의 진영, 창원, 칠원, 진동 등지 주민들은 마산의 장날에 와서 목욕을 하였다고 한다.

[공동 욕탕 훔쳐보기]

일제 강점기의 공중목욕탕을 훔쳐보다가 생긴 일화가 김형윤의 『마산 야화』에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불교와 기독교에서 남녀 간에 편연(片戀)하는 것도 오계 가운데 간음이라고 했다. 더욱이 여성의 나체를 보는 것은 더 큰 간음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가리켜 시간(視姦)[훔쳐보기]이라 한다.

구마산에 처음 생긴 공중 욕탕은 상반탕과 명호탕이었는데, 이후 시설이 미비한 욕탕이 생기자 남자들의 훔쳐보기가 늘게 되어 목욕탕 수입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부터 여성들 중에서도 훔쳐보는 이가 생겨나게 되었다. 여성 2~3명이 한 조를 이루어 화입구(火入口) 창틈으로 뭇 남성을 훔쳐보았다고 화부(火夫)들은 진술하였다.

필자가 아는 시장의 한 상인은 매일 목욕탕에서 필자와 자주 만났었는데 여러 달이 지나도록 목욕탕에서 볼 수 없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장사가 바빠 목욕할 틈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 후 알고 보니 신문에 훔쳐보기 사건이 나자 경찰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목욕탕 주인이 훔쳐보던 곳을 막아 버렸기 때문에 그 상인이 목욕탕에 올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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