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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절과 매불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11179
이칭/별칭 웅신사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정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8년 - 「곰절과 매불골」 『진해 스토리』에 수록
관련 지명 곰절(성주사) - 경상남도 창원시 천선동 지도보기
성격 전설
주요 등장 인물 이(李) 아무개
모티프 유형 사찰 연기|폐사|지명 유래|득병 모티프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전승되는 전설.

[채록/수집 상황]

『진해 스토리』[진해시, 2008]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옛 기록에 ‘불모산 아래 웅신사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산 이름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곰메[熊山] 중턱에 있는 웅신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웅신’이란 웅천의 옛 이름이고, ‘곰메’는 중턱에 있어서 곰절이라고 속칭했던 절이다.

곰절에 빈대가 들끓어 절 유지가 어렵게 되자 창원 쪽으로 옮겨서 지금의 성주사(聖住寺)가 되었다. 빈대가 들끓었다고 하는 그 빈대는 곤충이 아니라 음식 먹는 자리에 부르지 않은 사람이 객꾼으로 와 앉아 있는 경우 ‘빈대 붙었다’라고 하였던 그 빈대를 일컫는 것이다.

고려 사회의 절은 면세 제도, 중의 면역 제도[병역과 부역의 면제]가 있어 융성할 수 있었다. 아들을 가진 부모들이 재물을 절에 시주하고 아들을 중이 되게 하는 일도 많아 이런 사회 제도로 빈민들은 절을 찾아 걸식을 잘 하였다. 이럴 때 절에서 이런 사람들을 빈대라 하여 냉대하면 사세(寺勢)가 기울어졌다고 한다. 웅신사도 이런 내력을 가지고 창원 방면으로 넘어갔고, 그 때 불경을 이고 날랐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곰절이 떠나고 얼마나 지났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그 자리에 광석사를 세운 일이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절을 폐사하면서 그 자리에 부처를 묻어 두었다. 그래서 매불(埋佛)골 이라고 하였다. 이 매불골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북부리에 사는 이(李) 아무개가 어느 날 곰메에 나무하러 가는 길에 짓궂게도 매불골에 있던 작은 부처를 파내어 장난삼아 깨뜨려 버렸다. 그러고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곰메에 올라 땔나무로 할 썩은 밑둥뿌리를 캐다가 왼쪽 다리를 다쳤다. 돌아와서 상처에 아무리 약을 쓰고 침을 맞아도 낫지를 않았다. 마지막 수단으로 굿을 하고 무당이 신장대를 잡아보니 신장이 강신을 하여 소수풀이를 하는데 그 깨뜨린 부처가 액운이 되어 몸에 침노하였다는 것이었다.

[모티프 분석]

「곰절과 매불골」 이야기는 웅신사의 창건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찰 연기 설화(寺刹緣起說話)와 사찰이 빈대가 들끓어 절이 망하게 되었다는 폐사 모티프, 그리고 매불골에 묻혀 있는 불상을 파내어 깨뜨린 죗값으로 병을 얻게 된다는 득병 모티프, 마지막으로 매불골의 ‘지명 유래담’ 등이 뒤섞여 나타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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