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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산동 동사(洞舍) 건립 에피소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A010201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귀산동 석교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정헌

일제강점기 귀산본동에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나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공부를 그만두게 된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글을 가르치던 마을 어르신이 계셨다. 그분은 바로 고(故) 이수복 옹으로서, 일제강점기에 마을 구장도 했던 분이다. 대동아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자 그 해 8월 일본인은 본국으로 돌아갔고, 전쟁에 쓰던 물건들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수복 옹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탄약창(탄약창이 있던 자리는 현재 해군의 진해기지사령부가 들어서 있음)을 뜯어다가 마을 동사를 짓는 데 쓰도록 승인을 받았는데, 주 용도는 공민학교였고 겸해서 동사무소로도 사용할 수 있게 허가를 받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제일처럼 기뻐했다. 지금까지 남의 집 사랑방을 빌려 글을 배우다가 학교 건물이 세워진다는 데 이 이상 기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동사를 짓는 데 필요한 자재의 운반이 문제였다. 탄약창에서 동사를 짓는 곳까지 거리는 3㎞ 정도나 되었다. 그것도 꾸불꾸불한 산길에 논두렁과 밭두렁을 지나야 했다. 부득이 무거운 목재를 지게에 지고 운반할 수밖에는 달리 길이 없었다. 집을 짓는 데는 진해 사람인 도목수 주수복(귀산본동에 살던 홍응철의 사위였다) 씨가 중심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귀산본동에 살던 목수 박기성 씨가 무보수로 일을 도왔다. 이외에도 이상현 씨 등 많은 사람과 청년들이 한데 뭉쳐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동사를 건립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데, 이는 36년이란 일제강점기 기간 일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피동적으로 살다가 처음으로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한 첫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체 마을 사람이 일치단결하여 뜻을 이룩하고 남은 목재와 기와 등은 집을 한 채 더 짓고도 남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남은 자재를 귀산동사를 짓는 데 헌신적으로 애를 쓴 이종현 옹의 부친(당시 마을 구장이자 청년단장으로 일했던 고 이수복 옹)께 수고한 대가라고 하여 넘겨주었다. 이종현 옹의 부친은 이 자재들은 동사 앞과 논두렁에 쌓아두었다가 10년 후 아래채를 짓는 데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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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산동사를 건립한 마을 사람들

세월이 오래되어 목재의 대부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기와는 성해서 이웃 귀곡마을 사람이 새 집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고. 이종현 옹의 부친이 돌아가시자 당시 목수로 일했던 박기성 씨를 비롯하여 당시 청년이었던 사람들이 제사상을 짜서 고마움을 전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종현 옹은 이 제사상으로 조상님들의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정보제공자]

이종현(남, 1935년생, 귀산본동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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