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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 같은 인생이 또 있을라꼬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A030201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귀산동 석교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정헌

창원시 귀산동 588-2번지 에는 88세의 노인 한 분이 살고 계신다.

문패에는 ‘유공자의 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바로 이두봉 옹이 혼자 외롭게 살고 있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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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봉 옹

이두봉 옹은 30세에 결혼하여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현재는 모두 출가하여 인근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부인이 10년 전에 죽어서 혼자 지내고 있는 이두봉 옹은 젊은 시절 군대 생활을 남다르게 한 분이다.

이두봉 옹이 석교마을에 처음 왔을 때는 조명수(70세)라는 분 외에 7가구 정도가 터전을 마련하여 살고 있었단다. 이두봉 옹의 가족은 원래 진해 비봉마을에서 살았는데, 어쩐 영문인지 이두봉 옹의 나이 7세경에 이곳 석교마을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가족이 석교마을로 이사를 왔지만 이두봉 옹은 당시 진해에 친형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그만 둔 6학년까지 진해에서 살았다. 부모가 계시는 석교마을에는 1~2주에 한 번씩 오게 되었는데, 통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라 진해에서 석교마을로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해통제부를 거쳐셔 일일이 통행증을 발급받아 집에 올 수 있었다고.

해방을 맞이한 그 해 이두봉 옹은 다니던 진해경화소학교를 그만두었다. 어찌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그 후 19세 때 진해에 있는 선박 설계를 주로 하는 공창에서 반년 정도 일을 했다.

해방이 되고 몇 년이 지난 1949년 7월경 처음 징병으로 군에 발을 디뎠다. 15일간을 부산 사상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14연대로 기억하고 있다. 이곳에서 이두봉 옹은 징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을 쳐서 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산 사상에서 도망을 쳐 한 민가로 들어갔는데 노인 한 분이 있어서 사정사정하여 사복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도 알 수 없어서, 그 동안 들은 곳이라고는 부산 영도다리밖에 없는지라 마부에게 무조건 영도다리로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였다.

다행히도 검문 없이 영도다리 근처에 도착했는데, 이곳에는 마산을 오가는 배가 있었다. 천신호라는 정기선으로, 바로 석교마을 앞을 지나는 연락선이었다. 바로 집으로 가면 다시 붙들려 갈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는 가지 못하고, 익히 알고 있던 진해 이곳저곳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긴장되고 가슴 졸였던 날들은 지금도 기억하기 싫다고.

그나마 다행스런 일은, 당시 징용을 가는 청년들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몇 푼을 모금하여 준 돈이 조금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 돈으로 도망을 다니면서 끼니도 해결할 수 있었고, 한창 무더운 여름이었기에 얼굴도 가리고 햇볕도 가릴 수 있는 밀짚모자도 구입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학동마을 뒷산에는 큰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매일 많은 사람들로 붐벼서 마치 시장이 선 것 같았다고 한다. 떡장수도 있어 끼니 해결에 도움이 되었단다. 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얼굴이 노출되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 달 정도를 뜨내기 생활을 하다가 집으로 몰래 들어가니, 이미 부모님이 당시 징집되면서 무상으로 받은 군복 값으로 600원을 지불한 뒤였다. 그리하여 이제는 군대에 잡혀 갈 걱정은 없을 거라 여기면서 집안일을 거들며 지내는데, 탈영병을 잡으러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동안 부모님은 물론이고 이두봉 옹 역시 밤잠을 못 이루며 가슴 졸이며 생활하였다.

이듬해인 1950년 창원 상남에서 군에 입대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마을 사람들이 많이 지원하자 이두봉 옹도 지원을 하게 되었다. 진해경찰서에서 3일 정도 교육을 받았는데, 순경 지원자가 있으면 손을 들라고 해서, 이두봉 옹은 그곳에 가면 좀 편할 줄 알고 마을 사람 세 명과 같이 순경교육을 받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작 교육을 받으러 갔더니 순경 교육이 아니라 전투경찰 교육이었다. 당시 전투경찰은 전라도 공비 소탕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작전 중에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그래서 순경이 되지 못하고 전투경찰이 될 바에야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진해여자고등학교에서 1주일 가량 훈련을 받다가 도망쳐서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이번에는 나라에서 다시 징집 명령이 떨어졌다. 전쟁이 한창 때인 것 같았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어 억지로 군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대구 남산소학교에 모여 1주일 정도 훈련을 받고는 바로 수도사단 1연대 3중대 1소대에 배치되어 전투에 투입되었다. 당시 수도사단은 강원도 동해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얼마 안 있어 경주에서 포항으로 동부전선을 따라 진격을 계속하여 함경북도 청진까지 올라갔고, 다시 1·4후퇴를 맞이하여 함흥에서 배를 타고 강원도 묵호항에서 하선하여 다시 일선에 배치되었다. 이때가 1952년경이었다.

이 후 다시 1년 정도 지리산 공비 소탕(토벌) 작전을 수행한 후 이번에는 중부전선에 투입되었다. 이곳에서 전투 중에 파편으로 다리에 부상을 입게 되어 부산의 모 국군병원에서 보름 정도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긴급했던지 얼마 쉬지도 못하고 다시 설악산 근처의 5사단에 배치되었다. 그곳 3·15고지에서 전투 중에 1953년 마침내 휴전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제대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시 전라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때가 1953년 11월경이었다.

눈을 녹여서 밥을 지어 먹기도 하고 며칠 동안 세수는 물론이고 눈을 뭉쳐 몸을 씻을 정도였으니, 당시의 고생은 어디에도 견줄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배식만큼은 좋아서 그나마 살맛이 있었다. 여기서 1년여 작전을 수행하다 다시 이유도 모르게 중부전선에 배치되었다가 마침내 1955년 4월 15일에야 기나긴 군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제대한 곳은 강원도 정곡이었다. 실로 6년 만의 일이었다.

이 후 이두봉 옹은 마을로 돌아와 부인을 만나서 가정을 일구고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부인은 개발(바지락)을 캐면서 살림을 마련하고 자식들을 길렀으며, 자신은 나룻배를 이용하여 3~4일에 한 번씩 화목을 마산 어시장에 팔아 쌀과 보리 등 양식을 장만하며 생계를 이어 왔다고 한다.

[정보제공자]

이두봉(남, 1930년생, 석교마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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