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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우물 이야기, 통새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C010204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봉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수정

봉산마을 중앙인 16번지에는 ‘통샘 터’라는 글이 새겨진 표지석이 하나 있다.

이것은 최근까지 이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우물자리를 표시해 둔 것이다. 통새미라 불리던 이 우물은 예부터 물이 흘러넘칠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였으며, 날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물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여 사람들이 이용하기 편하였으며, 맛 또한 좋아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이용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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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새미터

황봉광 옹은 통새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자여에는 4개의 마을이 있는데, 송정에도 공동우물이 있었고, 봉산에는 통새미가 있었고, 여튼 4개 마을 모두 공동우물이 있었어. 그래도 다른 마을 사람들도 와서 마시고 떠가고 했던 새미는 이거(통새미)밖에 없어. 물이 원체 깨끗하고 많았어. 물을 많이 퍼마시지 않으면 밤새 물이 흘러넘쳤어.”

마을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물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통새미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이 형성되던 시기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통새미는 마을에서 주요 식수원으로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마을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통새미의 물이 풍부하던 시절에는 새벽부터 우물가에 사람이 넘쳐흘렀다. 옹기그릇을 머리에 이고 물을 뜨러 오는 아낙, 식구들 먹을 보리쌀을 씻으러 오는 아낙, 채소를 들고 나와 음식 재료를 준비하는 아낙 등 매일 아침 우물가는 분주하였다고.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예전에는 시집오는 새색시들은 자신이 타고 오는 가마에 바가지를 10여 개 달고 왔다. 이는 그 시절 흔히 사용되던 바가지가 표주박으로 만들어져서 강도가 약해 조금만 부주의해도 깨지기 쉬웠는데,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긴장한 신부는 조금만 부주의해도 바가지를 깨뜨리기 일쑤였다고. 그때마다 시댁의 새 바가지를 사용하면 시댁식구들의 곱지 않는 시선을 받게 되기에 친정에서 미리 준비해 와서 자신의 부주의함을 감추고 시댁 눈치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단다. 그렇게 그때는 여러 개의 바가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봉산마을에서도 갓 시집온 새댁들이 통새미에서 숱하게 바가지를 깨뜨렸다고 한다.

통새미는 마을 아녀자들의 생활공간이었으며, 반면에 남성 주민들에게는 금지 공간이었다. 이는 물이 주로 이용되는 생활이 대부분 여성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더불어 샘 주변에 여성들이 항상 북적였기 때문에 남성들은 자연스레 접근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리고 우물가에서는 연로한 여성 어르신들이 자리 잡고 앉아, 오고가는 새댁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칭찬과 야단을 서슴지 않았다고.

“옛날 마을에 최익도 씨 조모 되시는 분이 마을 부녀자들의 대장과도 같았어. 이 노인이 덩치가 크고 기품이 셌다고. 마을 부녀자들이 이 새미에 안 오면 물을 가져다 쓸데가 없거든. 이 안노인이 새미를 지나가는 길목에 앉아서, 새미를 찾는 부녀자들이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할 때나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큰 소리를 내어서 야단을 치곤 했어. 이 늙은이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 모두 다 따랐거든. 그 당시 그분은 마을 부녀자들을 호령했는기라.”(황봉광, 남, 90세)

이 통새미는 두 차례 큰 변화를 겪는다. 먼저 지금으로부터 약 75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자연석으로 둘러져 있던 우물을 높이 2자(60㎝), 외벽 5자(150㎝) 규모의 반듯한 네모 모양으로 틀을 짜고 시멘트를 이용하여 정비하였다.

샘 정비는 남성 주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시멘트를 배합해 주는 기계가 없어 모두 주민들이 손수 작업을 하였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황봉광 옹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그때는 무거워서, 그게(시멘트 반죽) 너무 무거워서 고생 많이 했다.”고 고개를 저었다. 1주일 동안의 공사를 통해서 통새미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후 통새미는 마을의 주요 식수원으로서 지속적으로 이용되었으나 각 가정에 수도가 설치되고, 상수도와 지하수 공사가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면서 샘의 물이 마르기 시작하였다. 이 후 주민들이 통새미를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마을회의를 통해 우물을 메우기로 결정되어 1997년 샘은 메워졌다.

샘을 메울 때는 우물 중앙에 대나무가지를 꽂았으며, 이 후 간단한 음식을 장만하여 동신에게 우물을 메움을 알렸다. 이 모든 과정은 남성 주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주요 식수원으로 이용하였던 통새미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쉬워 그 터에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고 한다.

[정보제공자]

황봉광(남, 1919년생, 봉산마을 거주)

김문학(남, 1925년생, 봉산마을 거주, 송산노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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