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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자식들 공부 다 시켰다 - 단감 재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C020103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봉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수정

창원시 동읍에 단감이 재배되기 시작한 지는 근 100여 년이 다 되어간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서 시작된 단감 재배는 김해시 진영에서부터 시작되어 동읍 일대로 번졌다. 그러나 봉산마을에서의 단감 재배는 인근 지역에 비해서 늦게 시작되었다.

봉산마을 사람들은 벼농사를 주로 지었으며, 이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러나 봉산마을의 농지는 천수답(天水沓)이었다.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저수지나 보(洑) 시설이 미비하여 마을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하여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비가 오는 시기에 맞추어 모내기를 하였으며, 날이 가물면 그 피해를 고스란히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이 되던 해에 정부에서 농업용수 확보를 위하여 봉산소류지를 조성하였다. 이 후 봉산마을에서는 농업용수가 충분해지자 벼농사에 더욱더 치중하게 되었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벼농사가 더 이상 소득 증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자 봉산마을에서는 특수작물로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근 마을에서 단감 재배로 큰 소득을 올리자 봉산마을에서도 뒤늦게 단감 재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봉산마을전단산 자락에 위치하기 때문에 논보다는 밭이 더 넓게 분포하여 단감 재배를 위한 농지 확보는 쉽게 이루어졌다.

단감 재배로 인한 상품화는 1980년대 이후부터로, 일반 농작물에 비해서 소득이 높았다. 1980~1990년대를 지나면서 단감은 마을에서 가장 큰 소득을 안겨 주는 작물이 되었다. 이는 국민들의 소득 증대에 따라 단감 수요가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저장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시사철 단감을 판매할 수 있어 더욱 소비가 증가하게 된 것이다.

농촌에서 농사꾼으로 평생을 살아온 마을 사람들은 자녀들에게만큼은 그 삶을 그대로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봉산마을 사람들 역시 자녀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교육의 기회를 최대한 제공해 주고자 했다. 그리고 단감 재배로 얻어진 수익은 자녀들의 학비를 지원해 줄 수 있을 만큼 충분했다. 주민들은 “단감 팔아서 벌은 돈은 자식들 교육비로 다 썼다.”거나, “단감으로 자식들 공부 다 시켰다.”고 이야기한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시골 어르신들은 자식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 기회를 주는 것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봉산마을에 한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근 동읍에서 단감 재배를 하는 농가들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단감의 소비가 1990년대 말부터 줄어들기 시작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그 상품성이 많이 떨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주민들이 고령화되면서 농사일에 전념할 수 있는 인력이 부족해졌다. 현재 봉산마을전단산 자락에는 단감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그러나 이 나무를 관리하고 단감을 수확할 일손이 부족하여 열매를 따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현 재 봉산마을에서 단감 재배에 종사하고 있는 가구는 5~6가구가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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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마을 단감과수원

[정보제공자]

황수남(남, 1945년생, 봉산마을 거주, 봉산마을 이장)

한판줄(남, 1941년생, 봉산마을 거주, 송산노인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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