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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줄을 만들기 위해 짚을 모으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C030202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봉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수정

자여마을의 줄당기기는 현재 정월 대보름 단 하루만 이루어지나, 예전에는 정월 대보름에 꼭 연희하는 것이 아니며, 하루가 아닌 여러 날에 걸쳐 이루어졌다. 보통 정월 초이틀부터 시작하여 길게는 20일까지도 줄당기기가 이루어졌다. 한때는 가을 추수가 끝날 무렵부터 골목줄을 당겨, 정월달에 큰줄을 당기기까지 하였다고.

줄을 당기는 날짜는 정확히 정해진 것은 없으나, 주민들은 반드시 당산제를 지낸 이후에 큰줄을 당겨야만 큰 탈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는 마을의 큰 행사를 할 때면 당산(堂山)에 고해야만 당신(堂神)이 마을을 보살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여마을의 줄은 마을별 대항으로 이루어졌다. 마을별 대항으로 이루어지는 줄당기기의 큰줄은 보통 수줄과 암줄을 따로 만들어 두 개를 연결하는 쌍줄을 사용하였다. 자여마을 역시 큰줄을 이용하였으며, 원줄(몸줄)에는 반드시 가닥줄(잔줄)을 만들어 엮어야만 했다. 이는 많은 사람이 줄당기기에 참여하기 때문에 가닥줄이 없으면 참여자 모두가 줄을 당길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원줄이 성인 한 아름의 굵기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참가자가 원줄을 당기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했다.

이렇게 큰줄당기기에 이용되는 큰줄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짚이 필요하였다. 그 시절 짚은 농촌사회에서 좋은 거름이 되고 가축의 사료가 되었으며, 난방에 이용되기도 하여 귀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줄을 만드는 데 짚을 아끼지 않았다.

골목줄은 어린아이들이 동네를 다니며 주은 짚으로 만들었다. 골목줄은 새끼줄을 두세 가닥으로 얇게 만들어 아이들이 재미로 당기는 것이기에 적은 양의 짚으로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큰줄은 그 규모가 성인 한 아름의 둘레와 암줄·수줄 합쳐 100m가 넘는 길이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아주 많은 양의 짚이 필요하였다. 이 때문에 짚을 모으는 일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참여해야만 가능하였다.

먼저 큰줄을 만들 때는 줄판이 벌어질 하천가에 농기를 꽂아 마을에서 짚을 모으기 시작하였음을 주민들에게 알린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적힌 농기가 세워진 것을 보고 사람들은 짚을 가져다 놓는데, 짚을 모을 때는 강제성이 없이,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만큼의 짚을 내놓았다. 짚을 많이 내고 적게 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이렇게 모은 짚은 큰 쌍줄을 만들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래서 줄을 만들 때면 다른 방법으로 짚을 더 모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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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줄당기기판, (구)자여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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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줄당기기판, (구)자여장터

“짚을 만드는 곳에 ‘농자천하지대본’이라 적힌 농기를 꽂아 놓으면, 우리는 어렸기 때문에 어른들이 나오면 그 뒤를 따라다녀. 따라다니면 어른들이 까꾸래이(갈고랑이)를 만들어 가지고 집 안에 있는 짚을 찍어서 뒤에 있는 우리들에게 던져 줬어. 던져 주면 우리는 몰려다니면서 던져진 짚을 안고 줄판에 갖다 놓고 그랬어. 그럼 아무리 자기가 쓸려고 내놓은 짚을 가져갔다 할지라도 줄판에 가져다 놓은 짚은 되가져가지 못했어. 그리고 그 짚을 가져간 것을 알아도 욕도 안 하고. 법이 그런 법이 되니깐 아마도 줄을 당겼지 싶어. 그러니깐 줄이 만들어졌지. 짚 한 단 가지고 갔다고 도둑놈이니 뭐니 이런 소리 하면 그건 장난이 아닐거야. 짚을 갖다 놓으면 생각도 안 하고 욕도 안 하고.”(황봉광, 남, 90세)

이와 같이 짚의 주인은 아무리 자기가 사용하려고 내놓은 짚이라도, 짚이 줄판에 놓아지면 다시 가져갈 수 없었다. 그리고 짚을 가져간 것을 알아도 욕을 하지도 않았다. 그 시절에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짚을 모으는 것을 묵인해 주었다. 만약 이 짚을 가져갔다고 주인이 짚을 가져간 사람을 도둑놈으로 몰거나 싸움을 하게 되면 쌍줄을 만들 때 필요한 짚을 다 모으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큰줄을 만들 수 있게 하였으며,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대동놀이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정보제공자]

황봉광(남, 1919년생, 봉산마을 거주)

김문학(남, 1925년생, 봉산마을 거주 송산노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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