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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제의 음복 첫잔의 주인‘황봉광 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C040101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봉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수정

황봉광 옹은 “난 아무 데도 가도 안 하고, 이 마을에 살았다고, 봉산에서 태어났는데, 16번지로 살림을 나가지고 여태까지 살고 있지.”라고 말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 봉산마을의 원로이다. 1919년 1월 21일 봉산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마을을 떠나서 살아 본 적이 없는 토박이다.

황봉광 옹은 형편이 좋지 않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농사를 배워,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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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광 옹

“그때는 신방초등학교 입학을 내놓고 형편이 안 좋아 가지고 못 갔다고. 그때는 국민학교 댕기던 학생 수가 요새 대학교 댕기는 수만큼도 못 갔다. 형편이 안 돼서.”

황봉광 옹은 23세가 되던 해에 동읍 무점리에 살고 있던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

현재 결혼 후 신접살림을 차린 봉산리 16번지에서 둘째 아들과 함께 계속 거주하고 있다.

황봉광 옹은 결혼 후 5남 2녀를 자식으로 두었으나, 현재는 3남 2녀만이 살아 있다. 그때 일을 기억하며, “아들은 다섯을 낳아 가지고 둘은 죽어붓고, 못머리에(어린 시절을 말하는 듯함). 다 죽어부릿다. 하나는 다섯 살 나서 죽고, 하나는 네 살 먹어서 죽었다. 중간에 열 살 차이도 더 난다. 능력이 없어가. 못 묵이가.” 하고 옛일을 회상하던 중 같은 마을 사람인 한판줄 옹이, “형님 아들 이름이 명섭인가? 죽은 아들 이름이?” 하고 묻자, “하도 오래 되가 아들 이름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들 서이(세 명)하고 딸 둘이. 그래 지금은 다섯이 살아가 있다.”라고 말을 맺었다.

봉산마을에서도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병이 이루어졌는데, 황봉광 옹 역시 이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집안에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황봉광 옹은 군대에 징병되지 않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 형편이 좋지 않았음에도 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던 사람에게 돈을 주고 징병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

“그때는 학생들 젊은 사람들 데리고 갔다고. 그때는 군에 안 갈라고, 면에서 오라고 통보를 하고 이랬거든. 면에 있는 사람한테 돈을 주고, 모병제도라는 이런 제도가 생겨 갖고. 대동아전쟁 때 그랬거든. 그래 해방되고 이런 제도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두만은 그래도 매 한가지라. 6·25동란 때 또 강제모병이거던. 그것도마, 그래서 살림 팔아 넣고 결국 가는 사람도 있고, 그때는 참 사는 게 사는기 아니라.”

광복 이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던 황봉광 옹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징병 대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다행스럽게 대상자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인근 함안 지역까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많이 입었으나, 봉산마을은 폭격 피해를 입지 않았다. 대신 피난민들이 많이 찾아와 곤욕을 치렀다고.

“6·25동란 때는 피난민이 여기(봉산마을)까지 내려왔어. 함안 저까지 이북이 저까진 밀려왔거든. 소도 오고, 사람도 오고. 부산까지 가면 산다고. 그까지 왔다가 끝이 났다 아이가. 마을에서 욕보기는 무엇을 욕봤냐 하면은, 1·4후퇴 때 저 우(위)까지 올라갔다가 다부(다시) 내려올 때, 그때 이북 사람들하고 병정(군인)될 만한 사람들하고, 저 사람들도 저 있기 싫으니깐에 젊은 사람들이가. 밥해 먹인다고, 저거들도 열두 시가 넘어야 들어닥치거덩. 밤에. 이래 가지고, 참 애먹었다. 꼭 열두 시가 넘으면 밥 때가 된다고. 면(정부)에서는 식량을 해결하고 나면 줄끼라 한다고. 근데 그게 어데 있노. 몇십 명이 이래 떡(배정) 되면 구장(이장)이 이를 맡아 가지고 각 반에 댕기면서 너거 반에 몇이 맡아라, 너거 반이 몇이 맡아라. 마 띠(분배) 줘 분다. 반장이 할 짓이 아니라. 누가 맡을라 하나. 밥해 주고 재워야 되는데. 아이 애먹었다. 그래 결국은 마지막에 음력 정월달 되가지고 그때 야학교를 하던 집이 동사가 돼서, 여기다가 솥을 걸어 놓고 죽을 끓여가 밥은 못해 먹고, 양식이 없어서. 그래 가지고 오면 학교 교실 안에 다가 한 몫에 주고 끝이 나가 안 오더라. 그래 거제수용소로 간다고 가데. 참 애 먹었다. 한 몇 달을. 전쟁 피해는 없었지. 그게 다 피해지.”

황봉광 옹의 말처럼 봉산마을에는 폭격의 피해를 입지 않은 만큼 피난민들이 많이 찾아왔다. 이 피난민들을 위해서 정부에서는 각 마을당 수백 명의 피난민들을 도와주라고 하였으며, 마을 이장들은 피난민들을 구호하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강제로 떠맡겨야만 했다. 좁은 방에 수십 명의 피난민들을 들여놓고, 없는 양식을 쪼개 죽을 끓여 양식을 해결하였다. 정부에서 피난민들을 도와주면 지원해 주겠다던 식량은 결국 오지 않아서, 봉산마을 사람들은 피난민들과 함께 힘든 고비를 보냈다고 한다. 황봉광 옹 역시 그 시절 마을 이장의 강요가 담긴 부탁으로 십여 명의 피난민들을 돌봐야만 했다.

“그때 내가 열일곱 명인가 몇이를 맡아가. 한 방에 다 넣고, 밥을 해 주고 나이, 전기가 여 처음 들어왔는데, 요그만 하거러, 벽을 틔워 가지고 한등(등 하나로)으로 두 방 쓴다고 미리 넣어 놨디만. 그리(등을 단 구멍으로) 들여다보이 밤새도록 자도 안 해. 꽉 비잡아서리(복잡해서). 그리 이바구(이야기)하는 소리 들어 보니까네, 나는 어디다 뭘 숨겨 놓고 왔고, 뭣을 어디다 숨겨 놓고 왔다고 했고, 이 잡고, 못 눕고, 앉아가 밤새 이바구만. 그게 난리라.”

작은 방에 17명의 피난민들이 들어가 너무 좁아 눕지도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힘든 한국전쟁을 지냈다.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황봉광 옹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신접살림을 시작하여 7명의 자식을 낳고, 기른 집을 개보수한 것이다. 짚을 얹어 놓은 지붕에 슬레이트를 얹었으며, 흙돌담을 콘크리트조로 바꾸었다.

또한 1970년대 중반에는 마을에서 좁은 골목길을 리어카가 다닐 정도로 확장하였다. 그때는 길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마을 사람들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마을 이장이 한 가구당 일정 구역을 배정하면, 각 가구에서는 자갈을 가져다가 배정해 준 구역을 책임지고 포장해야만 했다. 시멘트가 귀하던 시절인지라 골목길을 자갈로 포장한 것이다. 그때의 일을 황봉광 옹은 다음과 같이 기억하였다.

“길을 정비할 때는 부역으로 했는데, 동네에서 한 가구당 얼마씩 나누어 주는 거야. 자기가 맡은 구역에는 반드시 자갈을 가져다 깔아야 한다고. 면에서 마을 몫으로 얼마를 주면 마을에서 각 집마다 구역을 정해 줬어. 그러면 자기 구역에는 자기가 자갈을 깔아.”

황봉광 옹은 평생을 봉산마을에서 거주하면서 자식을 낳고 길렀으며 출가시켰다. 그리고 지금은 둘째 아들과 함께 마을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황봉광 옹은 다양한 마을의 변화를 몸소 겪으면서 90평생을 이곳 봉산마을의 산증인으로 살아온 것이다.

[정보제공자]

황봉광(남, 1919년생, 봉산마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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