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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광 옹 - 봉산을 기억하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C040102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봉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수정

봉산마을은 최근 100여 년 사이에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다양하게 변화된 마을 모습을 살펴보는 방법으로는 기록으로 남겨진 문헌 자료를 이용하거나,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담겨진 이야기를 더듬어 끌어내는 방법 등이 있다. 그러나 봉산마을에 대한 문헌 자료는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마을의 옛 모습은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마을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90년을 산 사람의 경우, 그 이전 마을 모습은 윗대 어른들에게서 듣는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은 채 150년이 넘지 못한다. 간혹 전설과 같이 이야기로 전해지는 기억이 그 이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나, 그러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더욱이 시대가 급변하는 오늘날 마을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황봉광 옹의 경우 1919년에 봉산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봉산마을에 거주하면서 1800년대 후반에 마을이 어떠하였는지 선대 어른들께 들은 것을 기억하며, 1900년 중반부터 현재까지는 마을에서 직접 생활하면서 변화를 몸소 겪었다. 황봉광 옹이 기억하는 마을의 역사는 다양하다.

봉산마을 사람들 역시도 마을의 역사를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사람으로 황봉광 옹을 꼽았다. 이는 그만큼 황봉광 옹이 마을의 역사를 살피는 데 중요한 주요 제보자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짚으로 모아 가지고 줄 당기는 거, 줄을 부르는 이름, 목줄 있고 뭔 줄 있고 하는데, 그거 알라면 그 어르신(황봉광)한테 물어 봐야 된다카이. 나이 많은 분한테 가야 된다카이. 정확하게 기록할라면 황봉광 씨 찾아가이소. 그분이 연세도 젤 많고, 정신도 또렷하고. 많이 알끼라.”(황○○, 남, 60대)

“그런 거는 나(나이) 많은 사람들이 알지. 요게 저 나 많은 할배들이 더러 있더라. 거(송산노인회) 가면 많이 안다. 할아버지들 많이 계시는데. 거도 이사 들어온 사람들이 많지. 본토박이는 별로 없을꺼라. 황봉광인가 하는 그 할배말고는, 거 가봐라, 많이 가르쳐 줄 꺼다.”(지동댁, 여, 76세)

먼저 봉산마을을 포함한 자여마을에는 1800년대 후반까지 자여역이 있었으며, 관원인 찰방이 단계마을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그 찰방은 자여마을에서 이루어지는 큰줄당기기를 비롯한 대동놀이에 관여를 하였다. 또한 봉산마을 실개천에서 자여장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황봉광 옹이 어린 시절,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황봉광 옹은 마을 내에 개교하였다가 이내 폐교된 간이학교도 기억하고 있었다.

실제 황봉광 옹이 간이학교를 다닌 것은 아니었다. 간이학교는 황봉광 옹이 워낙 어린 시절 잠시 문을 열었던 곳이기에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지, 황봉광 옹의 형이 잠시 이곳을 다니다가 신방공립보통학교[현 신방초등학교]가 개교하자 전학하였다는 아주 짧은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 황봉광 옹은 여름이면 지금은 사라진 송산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였으며, 저수지 앞의 물레방앗간에서 친구들과 함께 모여 놀았다. 그리고 벼가 수확되고, 농한기가 접어들고, 겨울철이 되면 마을 아이들끼리 모여 새끼줄을 꼬아 골목줄을 당기며 놀았다. 마을에서 큰줄당기기에 이용할 큰줄을 만들 때면 마을 어른들 뒤를 따라다니면서 짚을 모았는데,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우리 쪼그마할 때 어른들이 나오면 뒤따라간다. 따라가면 어른들은 까꾸래이(갈퀴)로 만들어 가지고 짚 있는 거를 까꾸래이로 찍어갖고 이래 던져주면 애들이 막 따라 댕기면서 줄판에 갖다 놓고 그랬어.”

나이가 들어 청년이 되었을 때는 직접 큰줄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뒷산 전단산에 올라 1년에 2~3회씩 회추를 즐기기도 하였다.

봉산마을과 송정마을에서 함께 지내던 동제의 모습에 대해 물어 보자, “봉산·송정의 동제는 산에 있는 제단에서 지냈어. 음식 하는 곳을 굿터라 해서 그곳에 가면 음식을 해서 제를 먼저 지냈어. 아마도 산신제였던 모양이래. 당제도 지내고 당산제도 지내고, 세 곳에서 제의를 지냈다고.”라고 소상히 말해 준다.

또한 황봉광 옹은 봉산·송정 마을의 동제가 중단되는 모습과 자여마을 당산제가 1980년대 새로이 복원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리고 1990년에 들어와서는 마을의 주요 식수원이었던 통새미를 메우는 일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자여마을의 당산제와 큰줄당기기, 달집태우기를 주관하여 이끌기도 하였다.

그러나 90세의 나이로 접어든 어르신은 더 이상 이러한 일을 주관하지 못한다. 단지, 마을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조용히 찾아서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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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새미터

황봉광 옹은 2008년 당산제를 지낼 때 청년회에서 당산나무에 금줄을 치지 않은 것을 제의가 행해지기 1시간 전에 목격하고, 당산나무 주변에 금줄을 손수 둘렀다.

금줄은 청년회에서 빼먹을 수 있다는 염려에서 노인회에서 며칠 전 왼새끼로 꼬아둔 것이다. 그런 다음 당산나무 옆에서 조금은 빗겨난 자리에 서서, 청년회에서 주관하여 제의를 지내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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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나무

제의가 끝나자 마을 이장단은 음복을 시작하는 제주(祭酒)의 첫잔을 마을 원로인 황봉광 옹에게 건넸다. 이 잔은 마을의 어른으로서, 당산제를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여러 모로 도움을 준 감사의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이처럼 황봉광 옹에게 봉산마을은 어린 시절을 보낸 추억의 장소이며, 젊은 날의 생활 터전이자 오늘날의 편안한 안식처인 것이다. 그리고 봉산마을에서 황봉광 옹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추억의 보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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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광 옹

[정보제공자]

황봉광(남, 1919년생, 봉산마을 거주)

지동댁(여, 1933년생, 용정마을 거주)

황○○(남, 60대, 봉산마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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