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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문헌으로 살펴본 마을 내력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E010104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외감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정용

외감마을의 연원을 알려 주는 가장 확실한 유적은 고인돌과 고분이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3기가 마을 앞 안산자락의 농경지 속에 있고, 가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군 2곳이 외감의 독뫼와 그 인근 지역에 있다.

고인돌과 고분의 존재는 이른 시기에 상당한 세력이 외감마을 주변에 살았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마을 북동쪽 독뫼 앞에는 옛 주거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마을 남쪽 반뜽에도 40여 년 전만 해도 몇 가구가 살았으며, 마을 동쪽 방고에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외감마을 자리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마을의 시원은 생각보다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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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 고인돌(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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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 고인돌

외감마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로, 이곳에서는 감계리(甘界里)로 나온다.

감계리는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 외감계리(外甘界里), 내감계리(內甘界里), 원지리(院旨里), 중방리(中坊里)로 나누어졌다. 외감이라는 이름이 직접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 바로 『호구총수』인 셈이다. 『호구총수』에 외감리의 전신인 외감계리(外甘界里)가 나오기 때문이다. 『호구총수』에 나오는 외감계리는 지금 외감리가 되고, 내감계리는 지금 내감리이며, 중방리는 지금 중방리가 되었다. 그리고 원지리는 지금은 외감리원지동이라는 경작지가 그 흔적이다.

이로 보아 『경상도속찬지리지』의 감계리는 당시 외감계리, 내감계리, 원지리, 중방리 일원의 여러 마을을 포괄하는 마을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훗날 『호구총수』에 와서 각각 독자적인 마을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후 원지리는 소멸되면서 인근 마을로 분속된 것으로 보인다. 옛 원지리 지역이 지금에 인근 마을의 지번으로 나누어진 것에서 그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원지리 지역의 대부분 지번은 외감마을 지번에 속한다.

이와 같이 감계리에서 외감계리가 분리해 나와 오늘날 외감마을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미 『경상도속찬지리지』의 감계리 속에 외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마을이 존재하였다 할 수 있으므로 적어도 외감마을은 『경상도속찬지리지』가 발간된 1469년 이전으로 소급할 수 있는 역사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방증하는 것이 허교(許喬)[1567~1635]와 그의 아들 허목(許穆)[1595~1682]이 외감마을의 새터에 우거(寓居)한 사실이다.

이때가 1620~1640년대로, 이들 부자는 이미 형성된 인근 마을을 피하여 한적한 새터에서 유일(幽逸)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허목과 관련된 구천(龜泉)이 지금도 새터에 남아 있다.

한편 『경상도속찬지리지』의 감계리에 있었다고 한 감계원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역원(驛院)이다. 감계원이 있던 그곳의 마을 이름이 『호구총수』에 나오는 원지리이다. 원지리라는 마을 이름은 주로 원이 설치된 곳에 붙여진다. 역원(驛院)은 고려·조선시대에 있던 숙박 편의시설인데, 감계원이 설치된 시대가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감계원이 위치한 곳이 당시 창원도호부에서 창녕 등지로 이어지는 길목이라는 점에서 보면 감계원의 설치 시대가 고려시대까지 소급될 가능성도 있다. 고려 말 몽고의 일본 정벌에 필요한 기관으로 설치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근처에 숲등이라는 속지명에 있는데 일본 정벌을 위한 군마의 휴식소였다는 구전이 있다.

이러한 역사성을 지니는 감계원(원지리)의 폐허지가 지금은 원지동이라는 넓은 농경지로 남았다. 이는 당시 감계원이 있던 원지리가 상당히 큰 규모의 마을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관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큰 마을 주변에는 작은 마을들이 생겨나거나 기존 마을은 큰 마을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때 작은 마을이었던 외감마을도 역사를 거듭하면서 큰 마을로 발전하였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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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산에서 본 외감마을

따라서 외감마을은 청동기와 가야의 역사를 품고 있으며, 독자적인 마을로서 모습을 갖춘 시기는 고려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고, 보다 큰 규모의 마을로 발전된 시기는 조선 전기 이후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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