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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선생의 자취를 찾아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E010201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외감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상현

넓은 들에 일렁이는 곡식들은 지난 여름 농부의 땀방울을 떠올리게 한다. 6월이었던가? 한 아주머니가 긴 논배미에 매달려 두렁을 치고 있던 것이. 마을 뒤편은 큰 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고, 산맥은 남으로 북으로 달려서 마산과 함안에 잇닿아 있다. 산은 창원의 주산 천주산이다. 그 앞으로 넓은 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이곳이 외감(外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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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천계곡으로 올라가는 길 옆 들판

아름다운 자연에는 인물이 깃든다 하였던가. 산이 좋고 물이 좋고 들이 좋은 이곳에서 필자가 미수(眉叟) 허목(許穆) 선생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이런 것을 두고 가경(佳景) 명승(名勝)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하는가 보다.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보면 누구든 미수 선생을 알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어제 일처럼 전해 준다.

예부터 온 동네 사람이 먹었다는 우물은 달천구천(達川龜泉)이라 불리는데, 이곳에 미수 선생이 거북돌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 위에는 달천정(達川亭)이 있어 매년 음력 4월 5일 그를 추모하는 제를 지내 오고 있다. 샘이 육신의 식수원이라면 계곡에는 정신을 맑게 할 약수가 흐르며, 더 많은 미수선생의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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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천정 방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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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천정

그렇다면 이곳에 미수 선생의 자취가 남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최근 이곳 달천계곡에는 반갑게도 ‘달천정미수허선생유적비(達川亭眉叟許先生遺蹟碑)’가 세워졌다. 비문을 읽노라면 미수 선생이 창원 지역에 머물게 된 연유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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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천정미수허목선생유적비

미수 허목 선생은 병자호란을 겪은 직후인 1637년부터 1646년까지 10년 동안 경상남도의 의령과 창원, 사천 등지에 머물러 그 자취를 남겼다. 창원에는 선대의 전장(田莊)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선생은 선비의 신분으로 쉬지 않고 경사(經史)를 읽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때때로 원근의 산수를 찾아 참된 정기를 길렀다는 것이다. 어림잡아 370여 년 전의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에서 약 1㎞를 오르면 달천동 계곡에 이르는데 형형색색의 나무들이 울창하다. 숲 밑으로 제법 물길이 큰 계곡이 뻗쳐 있다. 바위에는 ‘달천동(達川洞)’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외에도 바위 곳곳에 새겨진 글귀들이 보인다. 대부분 선생을 기억하는 인사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거나 선생의 언행을 추억해 온 모임의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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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산 진달래

허목 선생은 159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 자는 문보(文父), 호는 미수(眉叟)이다. 그는 한강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그림과 글씨, 문장에 모두 능해 많은 제자를 두었다. 노론과 남인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17세기 중엽 남인의 영수로 활동하는 등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았다. 노년에는 스스로의 전(傳)과 명(銘)을 지어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1682년 생을 마감하자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

미수 선생의 학문세계는 위로는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성호에게 이어지게 하여 영남 성리학과 근기의 실학에 가교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훗날 실학사상을 형성하는 연원으로도 거론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창원에 머물렀던 시기는 그의 학문이 온축(蘊蓄)되던 시기로, 창원의 지식인 사회와 유학의 근간에 큰 자양분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만큼 그가 지녔던 높은 학식과 폭넓은 견문은 이곳 창원의 풍광과 인사에 영향을 주고 혹은 받았을 것이다. 1708년 창원의 회원서원에 배향된 것도 그러한 결과물이 아닐까.

이제 선생은 가고 그 행적은 지난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유묵(遺墨)이 엄연해서 마치 그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스스로 새기면서[自銘] 후인들에게도 내려 준 경계의 말을 되뇌어 본다.

말은 그 행실을 가리지 못하고[言不掩其行]

행실은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하였네[行不踐其言]

다만 자족(自足)하여 성현의 글을 읽었을 뿐[徒嘐嘐然說讀聖賢]

하나도 그 허물을 더는 데 보탬이 되지 않았도다[無一補其諐]

-『미수기언(眉叟記言)』 권67, 자서속편(自序續編)-

천주산 정기를 한껏 머금은 달천계곡에는 오늘도 차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진달래가 수를 놓은 봄날, 달빛이 드리워진 계곡의 오랜 풍경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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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천계곡(여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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