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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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祖黙 |
이칭/별칭 | 강다(絳茶),육교(六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792년 - 이조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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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840년 - 이조묵 사망 |
묘소|단소 | 이조묵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남전 |
성격 | 문인|화가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인.
[개설]
이조묵(李祖黙)[1792~1840]은 시서화에 능했던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남전에 묘가 있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강다(絳茶), 호는 육교(六橋)이다. 할아버지는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문헌공(文獻公) 이창수(李昌壽)[1710~1777],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이병정(李秉鼎)[1742~1804]이다.
[활동 사항]
이조묵의 집안은 1700년대에 남포에 세거하고 있었다. 이조묵의 아버지 이병정이 이조판서로 있던 1797년, 남포현감 윤기(尹愭)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당시 이병정이 윤기에게 자신의 고향 일을 부탁하였지만, 남포 측근으로부터 불평을 듣게 되었고, 이에 대해 질책하자 다시 윤기가 답장을 보내 해명하는 내용이 보인다. 이를 통해 이조묵 집안이 남포현감을 통해 향촌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위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조묵은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시는 당나라 이상은(李商隱)[812~858]을 배우고, 글씨는 왕희지(王羲之)[307~365]를, 그림은 원나라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였던 황공망(黃公望)[1269~1354]을 배웠다. 또한, 금석고증(金石考證)을 즐겼다. 중국 청대의 화가 옹방강(翁方綱)[1733~1818]과 친교가 두터웠다.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이조묵이 가졌던 중국에 대한 기벽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조묵은 중국을 좋아하는 기벽이 있었고, 옹방강 즉 옹성원(翁星原)과 가장 잘 지냈다. 절사(節使)의 행차 때마다 후하게 선물을 보냈는데, 받는 것은 소략하여, 왕희지의 행서첩인 난정서(蘭亭序)의 세서(細書)를 겹겹이 싸서 보내 준 데에서 극에 달하였다. 옹성원이 이조묵을 만나고 싶어 하자 이조묵은 자신의 초상을 그려 보내 주었다. 옹성원이 다시 이조묵의 전신을 다 보기를 원해 돌을 깎아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역관에게 부쳐 주었는데, 역관들이 돈만 받고서 요동에 이르러 버리고 말았다. 말년에는 가산이 줄어 거처할 집조차 없어 방 한 칸에 세들어 살았다. 사람들은 중국을 좋아하는 자는 많지만, 가산을 탕진하기에 이른 것은 지나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중국의 글씨, 그림과 고완(古玩)을 국내에서 으뜸으로 수장하였고, 그림은 산수·난초·대나무가 묘경(妙境)에 이르렀다. 옹방강은 이조묵의 시서화(詩書畵)가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평가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나려낭림고(羅麗琅琳考)』·『육교고략(六橋考略)』·『탁비비결(拓碑秘訣)』이 있다.
[묘소]
묘는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남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