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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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正濟 間諜 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을경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7년 8월 - 김정제 간첩 사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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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김정제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출신 김정제가 정계에 침투하여 간첩 활동을 벌인 사건.
[역사적 배경]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가면서 남한과 북한의 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북한은 정보 수집과 체제 교란을 목적으로 간첩을 남한으로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였는데, 남파된 공작원이 일으킨 납북 사건과 월북 사건이 끊이지 않고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일련의 상황은 김정제 간첩 사건의 역사적인 배경이 되었다.
[경과]
김정제는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고등 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파주 및 양주 군수를 지냈다. 이후 광복이 되면서 서울 동대문경찰서장, 치안국 보안과장, 경무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가 수립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치안국 경무과장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경찰 사찰 부서에서는 김정제가 주관하고 있는 치안 일지가 누설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김정제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상대가 경무과장일 뿐만 아니라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손을 댈 수 없었다고 한다.
광복 후 김정제는 남로당에 입당하였으며, 동대문경찰서장으로 있으면서 남로당 중앙당 특수부 소속의 간첩으로 활동하였다. 김정제는 경찰에 관한 모든 정보와 국회의 비밀사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공산당에게 제공하다가 검거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탈옥한 김정제는 같은 해 7월 평양에 가서 밀봉교육(密封敎育)[간첩이나 기타 특수 목적을 수행할 사람을 기르기 위하여 바깥과 접촉을 금하고 비밀히 행하는 교육]을 받고 10월 피난민을 가장하여 남쪽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51년 7월 간첩으로 남파된 한영창으로부터 지령문과 공작금을 받고, 합법적인 활동 토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5·20 총선거에서 고향인 보령의 자유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다. 당시 김정제는 자유당 출신 민의원 이재학과 자유당 감찰부 차장 임일의 추천으로 입당 수속을 밟았다. 그리고 1952년 공작금으로 미화 1,700달러를 받고 간첩으로 암약하면서 수집한 정보를 무전으로 북한에게 보냈다.
[결과]
김정제는 한국전쟁 전후 두 차례에 걸쳐 간첩 혐의로 구속된 바 있으나 한 번은 공판까지 회부되었다가 한국전쟁 발발로 흐지부지되어 출감되었고, 또 한 번은 증거 불충분으로 출감되었다. 특히 1950년 5월 남로당 계열의 지하 조직원이 총 검거되었을 때 동대문경찰서에서 입수한 남조선 노동당 세포 문서 중 김정제가 남조선 노동당에 입당한 입당 원서가 나왔는데, 당시 검찰에서는 즉각 김정제를 구속하고 기소하였으나 공판이 개정되기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다가 1957년 8월 22일 김정제를 비롯하여 함께 활동하였던 일당들은 경기도경찰국에 검거되었다. 체포 당시 김정제가 간첩 활동의 대상으로 긴밀히 접촉하였던 인사는 장관급·국회의원 및 각 정당의 간부 등 고위층 인사 50여 명에 달하였다. 김정제는 1957년 겨울 사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