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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 분신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484
한자 -焚身事件
영어의미역 Yi Yeongil's Self-Burning Event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운동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990년 5월 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90년 5월 9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남도 창원시
관련인물/단체 이영일|(주)통일노조

[정의]

1990년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주)통일 노동조합의 간부 이영일이 노동운동 탄압에 항거하여 분신 사망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결성되자 노태우 정권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민주노조운동에 대해 집중적인 탄압을 가했다. 현대중공업노조의 파업투쟁에 공권력을 투입했으며, 서기원 사장 반대를 요구하며 제작 거부에 들어갔던 KBS에도 경찰을 투입하였다. 마산·창원 지역의 중심 노동조합인 (주)통일 노동조합에 대한 자본과 정권의 탄압도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이미 1989년에 테러와 구속, 해고를 통해 노동조합의 지도력을 붕괴시키다시피 했던 회사는 1990년에도 구속·수배자 복직 약속을 어기는 등 탄압을 계속했다. (주)통일 노동조합은 지도력 공백과 현장 조직력의 약화로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발단]

이영일은 사망하기 전인 1990년 5월 2일 저녁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중풍으로 쓰러져 7년 동안 투병 중이던 어머니에게 형사들이 찾아가 ‘자식이 노동운동을 하고 있으니 그만 두게 하라’고 협박했다.”며 괴로워했다. 이로 미루어 이영일은 회사와 경찰의 집요한 노조 탄압 공작에 분노하는 한편,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노조 간부로서의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과]

1990년 5월 3일 오전 8시 (주)통일 노동조합의 조사통계 차장이었던 이영일은 회사 1공장 식당 2층 옥상에서 분신을 시도하였다. 이영일은 분신 직후 동료들에 의해 창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사망하였다. 이영일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은 “군부독재 타도!”, “노조 탄압 중지”, “회사는 각성하라!”는 세 마디였다. 이영일의 분신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통일 노동조합원과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 1,600여 명이 창원병원으로 달려갔으나 경찰의 철통같은 봉쇄로 인해 병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추모집회를 마치고 200여 명의 선봉대와 규찰대만을 남긴 채 마산 시내로 나가 가두투쟁을 벌였다. 한편 경찰은 5월 4일 부검 직후인 새벽 1시 30분경 3천여 명의 특수기동대원들을 동원하여 시신을 탈취하고, 이에 저항하는 149명을 연행하였다.

[결과]

이영일의 시신 탈취 소식을 들은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은 1990년 5월 4일 사업장별 추모집회에 이어 오후 3시 경남대학교에 모여 ‘노조탄압분쇄 및 이영일 열사 추모집회’를 열었다. 이영일의 분신사건과 장례투쟁은 5월 1일~4일의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총파업투쟁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비록 마산·창원 지역은 시신 탈취로 인한 자괴감과 전술 운용 실패 등으로 투쟁력이 되살아나지 못했지만 전국적으로는 투쟁전선을 확대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영일의 장례는 5월 9일 경찰 병력이 회사 출입문을 차단하고, 600여 명의 참가자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주)통일 안에서 거행되었고, 대전시립화장장에서 화장된 이영일의 유해는 충청남도 대청댐에 뿌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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