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496
한자 勞動運動
영어의미역 Labor Movement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철

[정의]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노동자 계층이 그들의 생활 조건을 유지·향상시키기 위해 조직한 운동.

[개설]

노동 운동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노동 조합 운동이나, 노동 운동이 모두 노동 조합 운동인 것은 아니다. 노동 운동은 목적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생산자로서의 임금 노동자들이 임금과 노동 시간 등 노동 조건의 유지·개선을 목적으로 벌이는 노동 조합 운동이다. 둘째, 선거권을 가진 정치적 시민으로서의 노동자들이 조직적인 활동을 통해 정치 활동을 전개하는 노동자 정당 운동이다. 영국의 노동당이나 스웨덴의 사회당과 같은 계급 정당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소비자로서의 노동자들이 노동의 재생산과 관련한 운동을 전개하는 소비 조합 운동이나 공제 조합 운동 또는 협동 조합 운동이다.

이 중 창원 지역의 노동 운동은 주로 첫 번째 유형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1990년 중반 이후로는 극히 부분적이긴 하지만 두 번째 유형의 특징도 일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1. 1970년대

창원 지역의 노동 운동은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1974년 창원 지역에 기계 공업 단지가 건설됨과 더불어 노동 문제가 발현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창원 지역의 노동 운동은 인근의 마산 지역과 따로 떼어놓고 논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1970년대에 들어선 마산 수출 자유 지역이 비록 행정 구역은 창원과 다르지만, 노동자의 인적 구성이나 이후 노동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상당 정도 중첩적인 성격을 지니고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마산 수출 자유 지역의 경우 인근 농촌 등의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여성 노동자들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곳으로 마산 수출 자유 지역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1971년부터 노동운동도 함께 발생하였다. 마산 수출 자유 지역은 1971년 3월 12일 시작하였는데 1970년 한국 삼미, 적송 등의 사업장을 시작으로 1974년까지 약 50여 회의 노동 쟁의가 발생하였다. 이 당시 노동 운동의 주된 쟁점은 임금 인상, 노동 및 작업 환경의 개선, 그리고 노동 조합 건설 등이었다.

한편, 창원의 경우는 마산 수출 자유 지역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며 노동 운동이 발생하였다. 현재의 창원시는 1974년 창원 기계 공업 단지의 개발과 함께, 1976년 1월 1일 경상남도 창원 지구 출장소 설치, 1980년 4월 1일 창원시로의 정식 승격 등 행정적인 조직이 함께 완비되었다. 기계 산업 중심의 창원 국가 산업 단지의 조성은 마산 수출 자유 지역의 소규모 경공업 여성 노동력 중심의 그것과는 다른 특징을 보여주는데, 즉 대기업 중화학 공업의 남성 노동자 중심적인 특징이 이후의 노사 관계 또는 노동 운동의 성격을 결정하였다.

창원 국가 산업 단지가 조성된 1974년은, 제1차 오일 쇼크[1973]의 여진이 가라앉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후 1979년의 제2차 오일 쇼크 등 가동이 본격화되자마자 불어 닥친 세계적인 경제 불황의 영향으로 초창기부터 극심한 노동 쟁의가 발생하였다.

당시의 역사적 사건이었던 1979년 부마 항쟁 역시 창원 지역의 노동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임금 체불이나 열악한 노동 조건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당시 권위주의적 유신 정권이 지니고 있던 노동 조합 설립 금지 등의 병영적인 노동 통제 및 노동 정책 등에 항거하는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일어난 노동 운동은 단위 사업장 중심의 경제적인 투쟁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항의는 자발적인 작업 거부, 농성, 그리고 파업 등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경제적인 투쟁에 덧붙여 주목할 만한 사안은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 조합의 건설을 위한 본격적인 첫 걸음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마산과 창원 지역을 아울러 1979년 상반기에만 4개의 신규 민주 노조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1979년부터 본격화된 창원 지역의 노동 운동은 1980년 5월의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등의 신군부에 의해 집중적인 탄압과 노동 조합의 해체 강요 등을 당하게 되면서 수면 아래로 잠기게 되었다.

창원 지역 노동 운동 태동기의 성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직까지 본격적인 지역의 연합 조직 등을 갖추지 못한 단위 사업장 중심의 운동이 대부분이었다. 둘째, 노동 운동의 쟁점 역시 노동 조건 개선 등의 경제적인 투쟁이 많았다. 셋째, 경제적인 투쟁과 더불어 노동 운동 진영의 조직적인 테두리를 갖추기 위한 민주 노조 건설 운동이 함께 진행되었다. 특히 이 측면은 향후 창원 지역 노동 운동의 기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민주 노조의 건설 과정은 단지 경제적인 투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 관련법과 제도의 개선 요구라고 하는 초보적인 사회 제도의 개혁 투쟁이라는 측면이 가미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 권위주의적 군사 정권은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 결성마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창원 지역 노동 운동의 성격에는 반정권 운동의 성격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1980년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신군부 정권은 한국 사회를 소위 ‘겨울 공화국’으로 만들면서, 사회 모든 부문에서 솟아 나오는 목소리들과 움직임들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 일변도의 정책들은 오히려 민주·민족 운동 및 노동 운동 진영의 끊임없는 저항을 오히려 더욱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다.

외형적으로 보면 조합원 수의 격감, 민주 노조의 강제 해산, 노조 활동가 및 민주화 운동 인사에 대한 초법적인 감금, 그리고 기업별 노조로의 조직 형태 변환, 노조 설립 조건의 개악, 제3자 개입 금지 등 노동 운동을 초토화시키는 정책들이 매일 같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정권의 이러한 조치들에 대항하는 민주·민족 운동 세력의 결집과 노동자·학생 연대 등의 노동 운동의 새로운 양상들이 전국적으로 들불같이 확산되고 있었다.

1980년대 전반 창원 지역 노동 운동의 첫 출발은 민주 노조의 재건설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컨대 마산·창원 지역 택시 노조의 경우, 1983년 7월 21일의 명진 교통의 신규 노조 결성 후 1983년 9월 말 까지 21개 사업장의 신규 노조 결성으로 확대되었으나 이러한 확대는 곧 이은 탄압과 방해 등으로 1984년 1월에는 13개 노조로 위축되었다. 택시 노조들의 투쟁은 엄혹한 군사 정권 하에서도 대중적인 가두 투쟁을 통해 이후 민주 노조 건설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1984년과 1985년에는 삼성(三星) 라디에타한국 중공업이 출근 투쟁, 해고 무효 소송 등을 통해 노조를 설립하였으나 또 다시 무산되었다.

한편 1985년 창원 지역의 가장 중요한 노동 운동으로 손꼽히는 것은 (주)통일의 사례였다. 1985년 초부터 약 50여 일간 진행된 (주)통일의 파업은 방위 산업체 최초의 조직적인 파업 농성이었다. (주)통일 노조의 1985년 파업은 1984년 가을의 단체협약 승리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85년 노조는 ‘임금 인상 대책 위원회’를 꾸려 임금 인상 투쟁[임금인상안 13.1%]에 돌입하였다. 노조 간부들에 대한 회사 측의 징계 등이 뒤따랐지만 조합원의 단결로 징계안을 철회 시키는 등 노동 운동의 기운이 가장 충만하였다.

한편, 이 과정에서 마산·창원 지역에서는 최초로 ‘단결’이라고 쓴 머리띠를 두르고 조합원들이 집회에 참석하였다. 노조 위원장의 직권조인 사무국장의 징계위 회부 등의 위기마저 돌파하고 마침내 요구 조건들을 쟁취하였고, 1985년 5월 1일 새로운 노조 집행부[위원장 문성현]가 들어섰다. 그러나 6월 26일 노조 간부 16명 전원은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모두 연행되었다.

그러나 (주)통일 노조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6년 3월 16일 점심 시간을 이용한 핵심 조합원과 대의원 중심의 투쟁 등을 꾸준히 이어갔다. 조합에 돌아온 것은 80여 명에 달하는 구속과 해고, 강제 및 권고 사직자들이었다. 사업장으로부터 강제 퇴출된 이들 활동가들의 삶은 매우 힘든 나날이었으나 이들은 각종 종교 단체나 사회 단체의 교육과 모임을 통해 소위 ‘선진 노동자’로 성장하였다.

이상과 같은 1980년 중반까지 창원 지역의 노동 운동의 역사적인 의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각 사업장 단위에서의 노동 운동은 엄중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갖고 펼쳐졌다. 둘째, 그러나 아직까지 이러한 노동 운동의 성과를 효과적으로 지켜주고 수합할 수 있는 지역의 결집된 조직적 힘이 충분치 않았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목적적인 노동 운동의 지향점을 갖고 있는 현장의 활동가들이 배태되고 성숙하는 단계였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을 가져오게 된 배경은 현장 활동가들의 노동학습과 소모임이 함께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7년의 창원 지역 노동 운동은 6월 항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1987년 4월 13일 정부의 호헌 조치에 반대하는 민주 운동 단체와 대학생들의 시위로 촉발된 6월 항쟁은 점차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참여로 확대되었다. 즉 마산·창원 지역의 경우는 여타 대도시와는 달리 사무직 노동자들이 이 운동에 주축 세력으로 참여한 비중보다는 지역의 특성상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고, 그 뒤를 영세 상인과 일반 노동자들이 뒷받침하는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그리고 6월 항쟁에 대한 일반 노동자들의 이러한 참여와 경험은 곧 이어 전개되는 7·8월의 노동자 대투쟁 기간 동안 큰 자양분으로 작용하였다. 1987년의 7·8월 투쟁은 한국의 노동 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고, 1987년 이후 약 10년간의 노동 운동의 성격은 이전의 노동 운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내용을 지니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 창원 지역 노동 운동의 첫 번째 특징은 ‘경남 지역 노동자 협의회’의 결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1987년 이전에는 노동 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 지역적으로 결속할 수 있는 조직이 없었거나 미미하게 존재하였던 반면, 1987년 ‘경남 지역 노동자 협의회’ 결성 이후 창원 지역의 노동 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였기 때문이다.

경남 지역 노동자 협의회’ 결성 직후 1987년 7월 5일 개최한 현대 엔진 노조 사례 발표회에는 약 300여 명의 지역 노동자들이 참석하였고, 이 노동자들은 앞서 말한 6월 민주화 운동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경남 지역 노동자 협의회의 이러한 사업에 참여한 창원 지역의 노동자들은 노동 운동의 물줄기를 드디어 분출시켰다.

7월 21일의 동명 중공업의 노조 결성을 시작으로 7월 한 달 동안 현대 정공의 노조 결성, 한국 중공업의 노조 민주화 추진 위원회 구성, 그리고 효성 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 농성 돌입 등이 뒤따랐다. 한편 8월에 접어들어서는 이러한 노동 운동의 양상들이 창원 지역의 전 공단으로 확산되었다.

8월 1일 세신 실업의 파업 농성을 필두로 현대 정공의 노조 결성 보고 대회 및 농성, 대우 중공업 1·2 공장의 7일 간의 농성, 삼성 중공업 1공장 일용직 노동자들의 농성, 그리고 한국 중공업·한국 캬부레타·한국 철강·범한 금속·대한 화학 기계·효성 기계 등에서의 농성이 이어졌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주)통일에서는 민주 노조 쟁취 추진 위원회의 선도로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 농성에 돌입하였는데 이 시기 파업과 농성, 그리고 기타 다양한 방법으로 노동 운동에 참여한 노조 등은 그 이름을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이를 구체적인 수치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 기간 동안 마산 수출 자유 지역에서만 2만 5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이는 전체 노동자의 약 67%에 달하는 수치이다. 한편 창원에서는 전체 노동자의 약 60%에 달하는 4만여 명이 참여하였다. 마산·창원 지역 참여 노동자들의 이러한 수치는 당시 이들 지역 전체 노동자 약 15만 명의 절반을 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종 다기한 노동 쟁의가 벌어진 사업장은 전체 사업장의 절반이 넘는 140여 개 업체였고, 9월 10일 전후에는 창원공업단지 전체 중 약 3분의 2 이상이 조업 중단 상태에 놓였다.

1987년 7·8월 창원 지역 노동 운동의 전개 양상은 이전의 그것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기업 기계 공업 남성 노동자 중심의 노동자들이 노동 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둘째, 이들은 비교적 동종업종에 속한 25~35세 사이의 젊은 노동자층이었고 고교 동문회, 직업 훈련원 동문회 등 일상의 친목회 활동 등이 운동의 기본 동력이 되기도 했다. 셋째, 노동 운동의 양상은 주로 선파업, 후협상으로 진행되었다. 소위 비합법 투쟁이 주요 특징으로 나타난다.

넷째, 단위 사업장을 넘어선 연대 투쟁, 공동 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다섯째, 일반적인 경제적 투쟁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인격권을 요구하는 내용이 기저에 흐르고 있었고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갑답게 대우하라”], 어용 노조의 퇴진을 통한 민주 노조의 건설이 운동의 핵심 내용이었다. 이 기간 동안 노조 민주화를 이룬 사업장은 창원 공업 단지의 경우만을 보더라도 20여 개에 이른다.

1987년 7·8월 동안 진행되었던 창원 지역의 노동 운동 열기는 8월 말 경에 이르게 되면 일단 가라앉았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언론의 부정적인 여론 조성, 쉴 새 없이 진행되는 집단 해고와 휴·폐업 조치, 노조 파괴 공작, 그리고 노조 간부 및 활동가들에 대한 구속 등이 있다. 여기에 덧붙여 사회적 분위기가 직선제 개헌과 야당 후보 단일화 문제라는 대통령 선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등의 원인도 작용하였다. 이러한 전반적인 노동 운동의 약화 국면에서도 의미 있는 노동 운동의 교훈이 생겨나게 된다. 즉 업종과 지역을 넘나드는 지역 연대 투쟁이 그것이다.

이는 (주)통일 노조의 노동 운동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1987년 8월 초부터 파업 투쟁을 벌이고 있던 (주)통일 노조는 8월 28일 마침내 민주 집행부를 구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불과 이틀 후 노조 간부들의 강제 연행 및 구속, 이에 항의하는 조합원들의 창원대로 진출 가두시위, 경남 지역 노동자 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학생 및 시민과의 연대 투쟁 등이 이어지나 (주)통일의 회사 측은 무기한 휴업 공고를 내렸다.

이에 (주)통일 노동자들과 부산 지역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상경 투쟁을 계획하였고 10월 27일 서울에서 열린 노동 운동 탄압 분쇄 결의 대회로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당시 선거 정치에 매몰 되어가던 민주화 운동 진영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지역과 업종을 넘어 하나가 되는 노동자라는, 노동자로서의 정체감과 연대감을 가져오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주)통일 노조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러한 노동 운동의 새로운 기풍은 보다 강력한 노동자 연대 조직의 결성이 필요하다는 자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이다. 그 과정을 보면, 먼저 1987년 11월 18일 ‘마창 노련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연대 조직의 기초를 다져나가고 이 과정에서 경남 지역 노동자 협의회 등과 같은 지역의 노동단체 및 활동가, 그리고 1985년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선진 노동자들의 역량이 결합하였다.

이러한 준비 기간을 거치면서 우여곡절 끝에 12월 14일 마산 수출 자유 지역과 창원 공업 단지의 노동자가 하나가 되는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이 탄생하였다. 이제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은 명실상부하게 해방 이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노동자들의 지역 연대 조직이 되었다.

비록 노동 조합 대표자 협의체의 성격으로 첫 출발을 하게 된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 이었지만, 1988년 이후로는 구체적인 지역 연대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 첫 번째 사업은 1988년의 공동 임금 투쟁이었다. 이후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은 임금 투쟁 교육뿐만 아니라 지역 노동자들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주요한 역할도 맡았다.

또한 지역 노동자들의 교육과 선전을 위한 기관지인 『마창 노련 신문』도 창간하게 된다. 당시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의 위상은 1988년 신규 노조 결성 당시 [마산, 창원, 진해 및 마산 수출 자유 지역을 모두 합해 총 27개의 신규 노조가 결성됨]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의 가입 공약을 내건 후보가 당선될 정도로 매우 높았다.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은 지역 협의체 수준의 단체였기 때문에 임금 교섭 등의 국면에서 직접 당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즉 상급 단체로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개별 사업장의 임금 투쟁을 되도록 통일시키고 집중시키는 일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마산·창원 지역 최초의 연대 집회가 되는 1988년 4월 14일의 공동 야유회 및 임금 투쟁 보고 대회를, 4월 17일에는 우여곡절 끝에 임금 투쟁 승리 전진 대회 및 노동자 큰 잔치를 창원 대학교에서 개최하였다.

그리고 5월 1일에는 그동안 한국 노동 조합 총연맹 창립일인 3월 10일의 근로자의 날 대신 ‘진짜 노동자의 날’을 선포하고 세계 노동자의 날 기념식을 열었다.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맹의 이러한 조직적인 활동의 결과 1988년의 임금 단체 협상 투쟁은 매우 성과 있는 결실을 맺었는데 대부분의 노조가 요구액의 60~80%를 쟁취했고, 시티즌 등의 노조는 100%를 쟁취하였다. 이를 통해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은 지역의 연대 조직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의 결성과 활동을 통해 얻게 된 지역 노동자들의 성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경제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 연대와 단결의 중요성을 경험하고 실천하게 되었다. 둘째,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의 모범적인 활동은 조직의 확대로 귀결되었다. 셋째, 이 결과 노조 위원장의 개인적인 결단이나 서명 등의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조합원 총회나 대의원 대회의 의결을 거쳐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에 정식 가입하게 됨으로써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은 상급 단체로 인정받게 되었다. 넷째,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은 1988년 하반기부터 단위 사업장이나 지역 차원을 넘어서는 전국 노동법 개정 투쟁 본부의 구성을 통하여 노동법 개정 투쟁이라는 전국적인 사회제도 개혁 투쟁에 나섬으로써 정치적 운동의 기조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법 개정 투쟁은 정치권과 자본의 불성실한 태도 등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었지만 노동 운동 진영은 이를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해내기 위해 전국적인 노동자 단일조직을 구축하였다. 이것이 1988년 12월에 결성된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이다. 이처럼 창원 지역에서의 1988년은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을 기축으로 한 노동 운동이 가장 활성화되고, 나아가 보다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노동 운동이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가기 시작하는 기념비적인 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1989년에도 이어지는데, 1989년은 노동 운동의 승리와 좌절이 동시에 교차된 해이기도 했다. 이 시기 창원 지역 노동 운동의 사례와 성과, 그리고 좌절의 내용들을 일일이 소개할 수 없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한 가지 역사적 사실은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이 전국 노동 조합 협의회의 중요한 산실이었다는 점이다. 1990년 1월 22일 출범한 전국 노동 조합 협의회는 1989년 및 그 이전의 노동 운동의 과정에서 투쟁의 산물로 태어난 전국적인 노동자 단일 조직이었다.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은 전국 노동 조합 협의회의 건설 과정에서 인적·물질적, 그리고 노동 운동의 자원들을 아낌없이 투여하고 참여하였다. 당시 전국 노동 조합 협의회의 가입 조합원 2만 6000여 명 중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 조합원이 2만여 명이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모은 전국 노동 조합 협의회 건설 기금 1억 3000만 원 중 약 1억 원 정도가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성금에 의한 것이었다.

3. 1990년대

1990년 1월 22일 위원장을 단병호로 하여 마침내 전국적인 노동자 단일 조직인 전국 노동 조합 협의회가 출범하게 된다. 그러나 전국 노동 조합 협의회의 건설과는 반대로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은 1989년 하반기부터 지도부의 대거 구속과 수배 등이 발생하면서 지도력과 집행력의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또한 일부 단위 노조에서도 이러한 사태를 방기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한편,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 조직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대림 자동차 노조의 압수 수색 및 연행 구속을 필두로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 산하 노조 및 노동 단체에 대한 탄압이 집중되었다. 이에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은 1990년 3월 16일 마산 창원 공동 투쟁 본부를 결성하기에 이르는데 이 과정에서 노조에 대한 업무조사 거부,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 탈퇴 거부 등의 활동이 성과를 거두면서 다시 한 번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을 지켰다.

이후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5·1절 전국 총파업 투쟁, 시민 운동 단체 및 학생 운동과의 연대를 통한 공안 정국 돌파 투쟁, 1990년 4월의 KBS 투쟁과 현대 중공업 파업 투쟁, 이영일 열사의 추모 집회, 반민자당 정권 투쟁 등에 결합한 연대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들도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자본과 정권의 지속적인 탄압과 이에 따른 지도력의 약화 등으로 인해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은 결국 1990년 5월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

1990년의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의 활동은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의 전체 역사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노동 운동의 귀중한 성과들을 만들어 냈다. 첫째,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 조직의 수호 투쟁 과정에서 조합원들의 정치적 의식이 높아졌다. 둘째, 지역과 업종을 넘어선 전국적인 연대와 실천이라는 노동운동의 기풍을 신체와 의식 속에 보다 깊이 각인되었다. 셋째,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이 중심이 된 창원 지역의 노동 운동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주요한 축으로서 기여하고 참여하였다.

1989년과 1990년의 이러한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의 활동 내용들은 이후 시기와 내용들은 조금씩 달랐으나 정권과 자본의 탄압과 압박을 넘어 보다 조직적이고 견고한 노동운동의 틀을 건설해나가려는 움직임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청송회’였는데 청송회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과 공식적, 비공식적 교류를 많이 해온 노조였지만 노조의 일상 활동마저 극심한 탄압을 받는 상황이 전면화 되면서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 및 전국 노동 조합 협의회에는 가입하지 않는 대신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과 전국 노동 조합 협의회와의 유대와 결속을 지속하기 위한 방안으로 1990년 11월 20일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그러므로 청송회는 현실의 탄압 예봉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 민주 노조의 조직 확대 강화를 지속시키려는 목적으로 결성된 것으로 이후 청송회는 ‘ILO 마창 공대위’ 가입, 청송회 주관의 ‘창원 지역 노동 조합 대표자 간담회’ 개최 등의 활동을 시작으로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과 그 궤를 함께 하였다.

1988년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의 창립 이후 창원 지역의 노동 운동은 성과와 한계, 투쟁과 좌절, 그리고 탄압과 돌파의 수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성장하였다. 특히 1991년 이후 지역에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한 노동 관련 단체[마창 노동 교육 연구소, 창원 노동 문제 상담소, 일꾼 노동 상담소, 경노협, 가톨릭 상담소 등] 및 지역의 유일한 민족·민주 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마창 연합과의 연대는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노동 운동이 지역 운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1992년 말부터 1993년 초까지 창원 공업 단지에 불어 닥친 고용 한파에 대처하기 위해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은 1992년 11월 14일 ‘마산·창원 지역 고용 문제 대책회의’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고용 관련 투쟁 사업장에 대한 공동 투쟁 및 지원 사업, 제도적·정책적 요구 투쟁 및 사업, 그리고 노동법 개정과 고용 안정을 위한 대중적 교육 선전 사업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한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 사상 처음으로 마산·창원 지역 전체의 산업 전반에 대한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고용위기에 보다 체계적이고 분석적으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마산·창원 지역에서의 이러한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 활동은 1995년까지 지속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5년까지 약 8년간 이어진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의 역사는 마산을 포함한 창원 지역 노동운동의 핵심이었다.

한편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이 해산되는 1995년은 마산·창원 지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노동 운동의 역사에서 크나 큰 한 획을 긋는 중요한 해였다. 그것은 바로 전국 민주 노동 조합 총연맹의 건설이었다.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은 1994년 12월 9일 출범한 전국 민주 노동 조합 총연맹 마산·창원 준비 위원회를 중심으로 공동 투쟁 본부 구성에 박차를 가하고, 1995년 3월 전국 민주 노동 조합 총연맹 (준)마산 창원 공동 투쟁 본부의 공식 출범을 성사시켰는데 마산 창원 공동 투쟁 본부의 가장 중요한 조직적 목표는 단위 노조의 현장 투쟁력 강화와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위한 조직 사업이었다. 이는 약화되어가던 지역 노동 운동의 투쟁성과 연대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기업별 노조에서 산업별 노조로의 전환을 염두에 둔 조직 활동이었다.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을 중심으로 지역과 업종을 넘어선 금속 산업 단일 조직화에 대한 모색이 시작되었다. 여러 논의와 토론 끝에 1995년 10월 18일 금속 연맹 서부 경남 지부(추)가 구성되고, 1995년 11월 11일 전국 민주 노동 조합 총연맹 창립 대의원 대회 시 이 조직은 금속 연맹(추)가 전국 민주 노동 조합 총연맹에 가입하고 대의원을 파견시킴으로써 해산하였다. 한편 전국 노동 조합 협의회도 1995년 12월 3일 해산을 공식 결의하게 되고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 역시 12월 16일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 제8년차 정기 대의원 대회와 해산 대회를 거쳐 전국 민주 노동 조합 총연맹과 산별 노조라는 노동 운동의 새로운 발전과정에 스며들었다.

[의의와 평가]

첫째, 창원 지역 노동 운동은 한국 자본주의 또는 산업화 과정과 함께 출발하였다. 그러므로 한국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점과 모순점들을 돌파해내려는 노동 운동의 일반적인 특징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특징 이외에도 마산을 포함한 창원 지역만의 독특한 노동 운동의 특성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즉 1970년대 초반부터 형성된 마산 수출 자유 지역과 창원 기계 산업 단지의 조성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이 지역 노동 운동의 성격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마산 수출 자유 지역과 창원 공단 형성 초기의 노동 운동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투쟁의 모습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노동 쟁의들이 단위 사업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특성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노동 운동의 양상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크게 달라졌다.

셋째, 노동 운동 양상의 변화는 1988년에 출범하게 되는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의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전개된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의 활동은 마산을 포함한 창원 지역 노동 운동의 핵심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그것은 무엇보다 단위 사업장을 넘어선 공동 투쟁, 경제적 투쟁과 병행된 사회제도 또는 정치적 투쟁, 지역과 업종을 넘어선 넓고 깊은 연대와 실천, 그리고 전국적인 차원으로 노동 운동을 한 단계 상승시킨 저력 등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1987년부터 외환 위기가 닥쳐온 1997년 말까지를 노동 운동사에서는 ‘87년 노동체제’의 시기라고 말한다. 즉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 이후 약 10년간 형성되어온 노동 운동의 기풍 또는 조직적 성과, 그리고 산업별 노조의 건설 시작 등의 내용이 87년 노동체제의 주요 특징이다. 이러한 1987년 노동 체제의 주요 성과들의 많은 부분들이 마산을 포함 창원 지역, 특히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의 활동으로 채워졌다고 할 수 있다.

마산 창원 노동 조합 총연합과 단위 노조, 활동가, 그리고 지역의 노동 관련 단체 등에 의해 조성된 창원 지역의 노동 운동 기조는 2000년대에 들어서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외환 위기 이후 창원 및 전국의 노동 운동 사정은 그 어느 때보다 위기에 처해 있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의 높은 파고가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희생을 초래하였다. 2003년 두산 중공업 배달호 노동자의 분신 사망, 같은 해 부산 한진 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의 자결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향후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될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는 창원 지역의 노사 관계 및 고용 관계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노동 운동에서의 진정한 위기는 이를 위기라고 인식하지 않는데 있으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데 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치열했던 창원 지역 노동 운동의 기풍과 정신이 현 노동 운동의 성과와 문제점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