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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134
영어의미역 Ferry Point, Port, Harbor, Boat Landing
이칭/별칭 도진(渡津),포(浦),진(津)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주용

[정의]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강이나 내, 좁은 바닷목에 배가 건너다닐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곳.

[개설]

나루란 말의 기원은 ‘나라(國)’에서 나왔거나 ‘나르다’라는 동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나라의 옛말은 ‘라라’이고, 이는 ‘나루’를 가리키던 명사로 곧 나라[국가]를 의미한다고 했다. 고대 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인근 부족 또는 집단과의 상업적인 교역이 시작되면서 나루가 생겼다고 보면 ‘나라’ 어원설도 이해가 된다. 고대에는 강과 바다를 차지하는 자, 또는 나루[포구]를 얻은 자가 그 일대를 지배하였다.

나루를 뜻하는 한자는 다양하다. 문헌에는 도(渡)·진(津) 등으로 표기되며, 규모가 큰 나루나 바닷가의 경우 포(浦)라고 불렀다. 이보다 더 대규모인 경우에는 항(港), 군사적 기능이 부여된 곳은 진(鎭)이라고 했다. 원래 나루는 물을 이용하는 교통의 요지이므로 시대에 따라서 물을 이용하는 교통수단의 변화나 연결되는 육로의 개설, 교량의 건설 등의 요인에 의해 그 중요성이 변화하고 혹은 영영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마산포, 낙동강 변의 나루]

1) 제포

제포는 조선 초기 최초 개항지의 대표적인 장소로 원래 이름은 냉이개[乃而浦]이다. 고려 말 이후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조선의 태조태종은 교린정책(交隣政策)으로 이들을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시키고자 왜인의 왕래를 허락하였다. 그런데 조선 초기 왜인들이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고 쇄도하자, 조선 정부에서는 왜인 수용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1407년(태종 7년) 왜선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浦所]를 군사적 통제가 가능한 곳, 즉 경상 좌우도의 도만호(都萬戶)가 있는 곳으로 한정하였다. 당시 경상좌도의 도만호는 동래현 관내의 부산포에, 경상우도의 도만호는 김해부 관내의 내이포[제포]에 있었다. 개항지 삼포(三浦)의 원류는 여기에서 시작되며, 제포는 조선 최초의 개항지로 2014년 현재 개항 607주년이 된다. 제포와 부산포의 개항 이후 왜인들은 개항장의 추가를 요구하였고,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여 1418년(태종 18년)에는 울산의 염포(鹽浦)와 고성군의 가배량(加背梁)을 개항하였다.

2) 마산포

마산포는 고려 시대 석두창이 위치하였던 포구로서 용마산 아래 있는 포구라는 의미와 몽골의 일본 원정 때 말을 실어 나르던 포구라는 의미로 여말선초(麗末鮮初)부터 불리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산포(馬山浦)는 원래 마산만의 작은 포구이름이었는데 나중에 행정 구역 이름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이는 본래 행정 구역 이름이었다가 나중에 한 포구의 이름으로 된 합포(合浦)와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760년(영조 36년)에 경상도의 세곡을 운반하기 위한 조창(漕倉)으로 창원 대도호부 관할의 마산창이 설치되면서 마산포는 조선 후기 남해안 최대 상업 포구의 하나로 발전하게 된다. 마산포의 발전 원동력이었던 조창은 현재 마산시 남성동 제일 은행 일대에 있었다고 추정되며 지금 마산시의 창동이란 지명도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상업 포구 도시 마산포는 열강에 의해 그 가치를 인정받아 1899년(광무 3년) 5월 1일 군산항·성진항과 함께 개항장으로 변모하게 된다. 마산포의 개항 업무 담당 관청은 창원 감리서였으며 창원 부윤이 감리 업무를 겸임하였다.

마산항의 개항은 비록 열강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으나, 우리 정부의 의지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당시 한반도 침탈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러시아와 일본 간의 외교적인 세력 균형을 통해 열강의 침략을 다소나마 저지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세력 균형 의지와는 무관하게 러일 전쟁이 발발하였고,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던 조계지는 일본의 소유로 넘어갔다. 1911년 1월 1일부터 진해 군항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마산항은 폐쇄되기에 이른다. 이후 마산항에는 일본인 마산 세관장의 허락 없이는 드나들 수 없게 되었다.

3) 낙동강 변의 나루

낙동강 변 나루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원 본포 나루와 마주한 창녕 부곡면 비봉리 유적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통나무배가 발굴 조사되었기 때문이다. 비봉리 유적에서 낙동강을 건너면 창원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유적인 합산 패총이 있다. 당시 신석기인들이 통나무배를 타고 비봉리 나루에서 출발하여 낙동강을 건너 합산 패총의 나루에 이르러 도토리와 조개를 교환하였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한편 비봉리 유적과 합산 패총에서는 바다에서 서식하는 조개가 발굴된 점, 주변에는 학포(鶴浦)·본포(本浦)·금포 등과 바다를 접하고 있는 나루라는 뜻을 가진 ‘임해진(臨海津)’이라는 지명이 존재하는 점, 이곳에서 우물을 파면 짠물이 나왔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는 점 등을 보면, 바닷물이 이 일대까지 올라온 것으로 추정된다. 1987년 낙동강 하구 둑이 건설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산란을 위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웅어가 이 일대에서 많이 잡혔다고 하니 하구 둑 건설로 인해 그간 이루어진 강과 바다의 소통이 단절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황]

창원 지역의 나루는 대체적으로 남해안과 관련된 바닷가 나루[浦]와 낙동강과 관련된 나루[津]로 구분된다. 바닷가 나루는 사화포(沙火浦)·지이포(知耳浦)·마산포(馬山浦)·내이포·합포·제포 등이 문헌에 등장한다. 하지만 바다와 관련된 옛 유적의 분포로 보아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나루를 통한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옛 유적이나 고문헌을 통해 나루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낙동강 강변의 나루는 현대식 다리가 건설되면서 사라진 대표적인 경우이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창원 지역에는 봉암 나루, 본포 나루, 신천 나루, 반월 나루, 수산 나루, 모산 나루, 유등 나루 등의 나루들이 생활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나루는 환경의 변화로 사라져 가거나, 시멘트 다리로 인해 점차 사라져 버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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