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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현 전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384
한자 露峴戰鬪
영어의미역 Nohyeon Bat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정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592년 9월 24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592년 9월 25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창원군 노현 일대
관련인물/단체 유숭인

[정의]

조선 중기 경상남도 창원 노현(露峴)에서 왜적과 벌인 전투.

[역사적 배경]

창원의 노현은 왜적의 무리가 진주와 전라도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요충지였다. 즉 부산에 상륙한 왜적은 3로(路)로 나누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중로(中路),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동로(東路),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서로(西路)로 진격해 왔다. 창원 지역을 내습한 왜적은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 휘하 병력이었으며, 김해와 창원·진주를 공략하였다. 부산과 김해를 무너뜨린 왜적들이 서진하는 데 있어 우선적으로 공격과 점령의 대상이 된 곳이 창원이었고, 창원에 진입하는 길목 중의 하나가 노현이었으므로 이곳에서 교전이 발생한 것이다.

[발단]

창원성을 수비하고 있던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은 왜적이 김해성을 함락하고 창원으로 진격해 온다는 보고를 접하고 출동하여 노현 일대에서 왜적을 방어하고자 하였으며, 적장인 구로다 나가마사가 지휘하는 제3군 병력은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진주 등지를 공략하기 위하여 창원 지역을 내습하려 했다.

[경과]

부산을 떠난 왜적은 김해성을 함락한 후 2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1592년(선조 25) 9월 24일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경상우병사 유숭인은 2,000여 명을 거느리고 창원성에 있다가 이러한 보고를 접하고 출동하여 노현 일대에 포진하였다.

24일 오후부터 적의 척후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곧이어 선봉대가 보였는데 산야(山野)가 모두 인마(人馬)로 뒤덮인 듯하고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때때로 함성이 요란스럽고 위협하는 총포 소리가 소란하였다. 유숭인은 진중에 명령하여 함부로 활을 쏘지 못하게 하고 인기척을 죽이고 기다리게 하였다.

왜적은 아군에게 계략이 있는지 의심하여 급히 공격하거나 포위하여 오지 않았다. 오후 4시경부터는 각 진에서 연막을 치고 신중하게 공격을 준비하는 듯했다. 이 때 적병 몇 명이 진 앞에 나타나 내부를 살피려고 말을 탄 채로 기웃거리자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 부장의 명령으로 화살을 집중 사격하여 격퇴시켰다.

그리고 이날 밤을 새웠는데 적진에는 진을 밝히는 불이 20리 앞들에 밝았고 인마의 고함소리가 요란하였다. 다음날인 25일 오전 10시경부터는 총포를 쏘면서 포위작전으로 진격해 왔다. 아군과 적의 병력차가 많았으므로 진지를 고수할 도리가 없음을 판단하고 퇴각하여 창원성 안으로 들어와 수비하였다.

[결과]

노현 전투는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거느린 2,000여 명과 왜적 2만여 명의 병력이 대치하고 교전한 전투이다. 중과부적으로 왜적의 기세를 꺾지 못하고 퇴각한 싸움으로 인해 창원 지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왜적은 창원과 함안에 주둔하면서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진주성을 포위하여 공격하고자 하였다.

전쟁이 발발한 지 2년 뒤, 울산의 서생포와 동래·부산·양산·김해·웅천·창원 등 해안선에 왜적이 집중해 있었다. 왜적과 전투하다가 함안과 진주 사이에서 전사한 조선 군사가 수만 명에 달하였고, 왜적은 경상 좌도와 우도에 걸쳐 세력을 수백 리에 뻗쳐 약탈을 자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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