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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특수강 노조 파업 투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486
한자 三美特殊鋼勞組罷業鬪爭
영어의미역 Strike Conflict of Sammi Special Steel Labor Union in 1992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92년 9월 14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92년 9월 25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남도 창원시
관련인물/단체 삼미특수강노조|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정의]

1992년 9월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삼미특수강 노동자들이 회사의 임금 동결에 맞서 일으킨 파업투쟁.

[역사적 배경]

1992년 당시 삼미특수강은 연간 100만 톤의 특수강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특수강 업체였음에도 1992년 임금단체협상 교섭에서 30% 감원설을 흘리면서 임금과 단체협상 동결을 주장하였다. 노동조합 집행부와 일부 교섭위원들 또한 회사 입장에 동조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이에 반발한 간부와 조합원들은 8월 19일 ‘인원감축 및 임금단체협상 동결 반대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행동에 나섰다. 마침내 조합원들은 임금과 단체협상 동결 대신 생산 장려금 25만원으로 교섭을 끝내려는 김진호 위원장을 불신임했고, 8월 25일 홍은표 부위원장이 직무대행을 맡게 되었다.

[발단]

홍은표의 태도도 타협적이었고, 현장에서는 임금과 단체협상 동결과 특별상여금 25만원 지급에 직권 조인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9월 1일 대책위원회의 한 대의원이 퇴근 조합원을 상대로 9월 7일 열릴 공청회를 홍보하다가 관리자와 경비들에게 구타당해 실신한 사건이 벌어졌다. 9월 7일 공청회도 관리직의 방해로 충돌이 벌어져 공장장과 대책위원회 간부들이 다치게 되었다.

[경과]

9월 7일 발생한 폭력사태와 직권조인 소문을 들은 3근조 조합원들은 9월 8일 아침 민주광장에 모여 임금과 단체협상 동결과 인원감원 결사반대를 외쳤고, 여기에 1근조, 2근조 조합원들이 합류하면서 조합원 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조합원들은 쟁의대책위원회(위원장 한성철)를 구성하였고, 추석 연휴가 끝난 9월 14일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회사와 경찰은 핵심 간부들에게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진입로인 봉암다리에 검문소를 설치하여 출입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조합원과 가족들은 쌀 가마니와 라면 상자를 짊어지고 산을 넘어 농성장에 전달하였고, 지역과 전국 차원의 지원·연대 활동도 활발하였다. 경찰의 포위·고립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강제 진압이 시작되었다.

[결과]

9월 22일 경찰은 헬기를 통해 선무방송을 하는 한편, 포크레인과 기중기를 앞세우고 최루탄을 쏘며 진입을 시도하였고, 노동자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대항하였다. 경찰은 몇 차례의 실패 끝에 9월 25일 새벽 5시 농성장을 진압하였다. 이 투쟁으로 18명이 구속되었고, 137명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10월 5일부터는 정상 조업에 들어갔으며, 노사는 ‘위로금 20만원 지급, 무노동 무임금 적용, 파업 관련 피해자 최소화’ 등에 합의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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