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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파업 투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488
한자 1994年罷業鬪爭
영어의미역 Strike Conflict in 1994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94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94년 - 1994년 파업 투쟁 종결
발생(시작)장소 경상남도 창원시

[정의]

1994년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발생한 주요 사업장 노동자들의 파업 사건.

[역사적 배경]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임금투쟁이 공동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쟁의발생 결의 등 투쟁시기의 집중이 계속 늦추어지는 상황이 발생하자 공동 투쟁전선 형성을 위해 5월 말 전국주요투쟁사업장 회의를 소집하였다. 여기서 전국기관차협의회가 적극적인 파업 투쟁 의지를 보이자 이를 축으로 전국적인 공동 투쟁전선을 구축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전국기관차협의회와 전국지하철노동조합의 공동투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1994년 6월 27일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 공동파업에 대해 전국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결의하는 등 전국적 연대투쟁을 조직해 나갔다.

이에 정부는 기습적으로 1994년 6월 23일 새벽 4시에 전국기관차협의회 전국 20개 지부에 공권력을 투입하여 선제공격을 가하고 농성조합원 613명을 전격 연행하였다. 그러자 이에 항의하여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 연대파업이 촉발되었다.

이에 따라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과 마산창원연합은 6월 25일 마산역 광장에서 노동자, 학생 등 3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국기관차협의회 공권력 투입규탄 및 민중생존권 사수 결의대회를 열었다.

[목적]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임금합의에 대한 반대, 물가폭등에 대한 국민여론과 관심 제고 및 물가안정을 촉구, 노동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한 정권 비판, 구속노동자 즉각 석방, 저임금 극복 등 국내의 전반적인 사회문제 및 노동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였다.

[발단]

1994년 3월 30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1994년 임금인상률 5.0~8.7% 합의를 발표하자 3월 31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가 이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고 강력한 공동투쟁 방침을 천명하였다. 이어 4월 1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산하 30여 개 노조 대표자들도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임금 합의에 대한 거부와 함께 공동투쟁 실천을 결의하였다.

한편 해고자들은 1994년을 해고자 완전복직 원년의 해로 정하고 1993년에 이어서 1994년에도 임금에 관한 단체투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해고자들의 투쟁을 방해하고 해산을 종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하 간부들 100여 명이 해고자들을 집단 폭행하여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전국 노동자들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을 규탄하고 항의하는 집회를 갖고,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의무금 납부거부 및 탈퇴를 결의하였다. 당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한국노동조합총연맹 탈퇴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추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임금에 관한 단체투쟁 교섭이 시작된 1994년 5월부터 파업 분위기가 고조되어 7월 초에 이르러 세신실업, 삼양전기, 현대정공, 효성기계, 타코마, 기아정기, 경남지역의료보험 등의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투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경과]

전면 파업을 전개한 노동조합은 세신실업, 두산유리, 삼양전기, 기아정기 등 총 4개 노동조합이었으며 부분파업에 들어간 사업장은 7개였다. 이들은 작업 거부, 잔업 거부, 강도 높은 준법 투쟁 등으로 투쟁 수위를 높이거나 휴식시간 연장, 총회 투쟁, 집회 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이 중 기아정기는 7월 18일 전면 파업에 돌입하였으나 7월 19일 단체협상이 통과됨으로써 하루 만에 파업을 철회하였다. 그리고 단체협상 중 부결되었던 임금 합의는 재교섭을 통해 7월 27일에 이루어졌다.

반면 두산유리는 배영석 위원장의 정직 6개월 징계로 교섭이 중단되었으나 7월 7일 한영길 노조위원장을 선출하여 7월 18일부터 교섭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9월 20일~21일 이틀 동안 시한부 전면 파업을 거쳐 9월 29일부터 전면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으나 10월 8일 노사 잠정 합의에 따라 정상 조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10월 13일 잠정 합의안이 부결됨에 따라 재협상에 들어가는 등 난항을 겪었다.

삼양전기는 조합원 27명으로 규모가 작은 노조였지만 노동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적극적인 투쟁에 나섰다. 조합원의 100% 출석으로 교육, 비디오 상영, 민중가요 부르기, 회사쪽 경영 방식을 비판하는 토론회 등 노동조합의 파업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였다. 회사 측은 대체 노동으로 작업을 하는 방법으로 대응하였다. 노동조합은 회사 측과의 교섭을 위해 14일간의 전면파업을 철회하고 7월 20일부터 정상 조업에 들어갔으나 교섭은 끝내 실패하였고, 회사 측은 8월 31일 폐업을 통고하였다.

[결과]

쟁의 행위를 결의한 13개 노조 중 전면 파업 이전에 10개 노조가 협상을 타결하였다.

[의의와 평가]

1994년 파업투쟁은 공동투쟁본부가 구성되지 못함에 따라 각 노동조합별로 진행된데다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 파행적으로 운영됨으로써 현황 집계조차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단위 노동조합 차원의 개별 투쟁으로 수세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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