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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갈천 전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1876
한자 早渴川傳說
영어의미역 Legend of Jogalcheon Stream
이칭/별칭 「조갈내 전설」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사화동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정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설|효행담|지명유래담
주요 등장인물 박신윤|노온
관련지명 사화마을|지귀마을
모티프 유형 박신윤의 효성|효성에 감복한 하늘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사화동에서 조갈천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1963년 경상남도지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경상남도지』와 1993년 한국문화원연합회 경상남도지회에서 출간한 『경남민속자료집』, 경상남도 창원교육청에서 출간한 『창원사랑 나라사랑』, 그리고 1996년 창원향토사연구회에서 출간한 『창원의 숨결』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사화동 밀양박씨 문중에 우곡(愚谷) 박신윤이란 사람이 있었다. 가난한 선비의 후손인 박신윤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으며, 또한 아홉 살에 소학에 입문할 정도로 학문에도 우수하였다.

집안이 궁벽하였으나 어린 나이에도 자못 의젓함이 있어 겨울철 얇은 겉옷에 빨갛게 얼은 다리일망정 대님만은 얌전히 맸고,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걸어가는 모습에 이웃들이 “과연 선비다.”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맨다리에 행건 친다’는 말이 이로부터 생겼다고 한다.

박신윤이 서른여섯 살 때의 일이다. 경상남도 창원시 지귀마을의 유력자 노온이 인근 고을 사우(士友)들과 함께 박신윤을 재각 낙성연(落成宴)에 초대하였다. 모든 사람이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홀로 박신윤만이 수저를 들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노온이 이유를 물으니, 병석에 누워 있는 노모 걱정으로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감동한 노온이 박신윤의 효성을 크게 칭찬하고, 연회가 끝난 후에 집에 가져갈 음식을 따로 마련해 두었음을 말하자 그제야 박신윤은 음식을 들었다고 한다. 때는 여름철인지라 박신윤이 노모에게 드릴 음식을 가지고 돌아가는데 마침 큰비가 쏟아져 냇물이 넘쳐 건널 수가 없었다. 박신윤이 탄식하여 하늘을 우러르며, ‘하늘이 나의 불효를 꾸짖어 죄를 준다’고 애통해 하며 글을 써서 물에 띄웠는데, 갑자기 물결이 갈라지며 징검다리가 나타나 무사히 내를 건넜다 한다.

그 후로 냇물이 갈라졌다 하여 이 내를 조갈천(조갈내)라 하였는데 비가 와서 홍수가 날지라도 이 조갈천만은 한나절만 날이 좋으면 징검다리가 보여 내를 건널 수 있다고 한다. 박신윤은 그로부터 2년 후 신병으로 젊은 나이에 어머니보다 일찍 임종을 맞게 되었는데, 부모보다 먼저 죽으니 불효라 하면서 죽었다 깨어나기를 세 번 반복하였으나 결국 눈을 뜨고 운명하였다고 한다. 이에 박신윤의 학문과 효행을 기려 운암사우가 건립되었고, 이 후 운암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지금도 음력 4월 25일에 운암서원에서 효자 우곡 박신윤을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다.

[모티프 분석]

「조갈천 전설」의 주요 모티프는 ‘박신윤의 효성’과 ‘효성에 감복한 하늘’이다. 박신윤의 효성에 감복하여 하늘이 내의 길을 터 주었다는 효행담이며, 냇물이 갈라졌다 하여 조갈천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유래담이다. 「조갈천 전설」경상남도 창원시 북면에 전해 내려오는 「효자거리 이야기」에서 개천물이 빠져나가는 이적(異蹟)과 유사한 모티프와 전개 과정을 취하고 있다. 「조갈천 전설」의 내용이 보다 구체적이고 극적이라는 점에서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효자거리 이야기」와는 차이를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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