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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36
한자 植民時期民族敎育-昌信學校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재하

[들어가는 말]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침략 야욕은 점차로 심화되어 갔고, 우리의 국운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기의 순간으로 내닫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의 당면한 과제는 하루 빨리 이 땅에 신교육을 통하여 몽매한 백성을 개화시켜 우리의 근대화를 실현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일제의 세력에 항거하면서 민족의 살 길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새 교육이 시작된 것은 선교사들에 의한 교회 학교였다. 외국 선교사들이 1885년 서울의 광혜원(廣惠院)에서 의학 교육을 실시한 것을 효시로 배재 학당·이화 학당·경신 학교·정신 여학교, 동래의 일신 학교, 평양의 숭실 학교, 대구의 계성 학교 등을 모두 합하면 950여 개교에 달한다. 마산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06년 5월 17일 마산포 교회[성호리 교회당, 문창 교회] 정문에 ‘독서숙’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교육 사업을 시작하여 1909년(융희 3) 8월 19일 창신 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아 근대 교육 기관으로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창신 학교는 시대적 상황만큼이나 수많은 질곡을 겪었고, 마산 지역의 민족 학교로서 지역민의 후원과 사랑을 받았으며 한편으로는 일제로부터 감시와 탄압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루어진 민족주의 한글 교육에 초점을 두고 민족주의 저항 활동을 하였다. 일제가 우리 말글을 식민지 지배의 통치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면, 당시 우리 한글 학자들은 우리의 말글을 민족의 대동단결 수단으로 삼아 그러한 일제에 당당히 맞서고자 하였다. 그 일에 수많은 창신 학교 교사와 동문들이 주축이 되어 몸소 실천했던 바, 그들이 진정한 사표(師表)였다.

[지역 근대 교육의 요람, 창신 학교]

1899년 마산은 군산·성진과 함께 개항되면서 일본과 러시아 등 제국 열강들의 군사·경제 침탈의 각축장이 되었다가 러일 전쟁 이후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 당시 마산포 상민들은 이러한 일제의 수탈에 완강하게 저항하였는데, 외국인에 대한 토지 불매, 사립 일어 학교 설립 반대, 일인 자본가들의 침탈에 대항한 시장권·매축권 수호, 어용 단체 신상 회사 철폐, 국채 보상 운동 참여 등은 그 대표적 활동으로 꼽힌다. 이러한 식민지적 상황은 교육 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권 회복이라는 민족사적 과제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강제성이 동시에 관철되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창신 학교가 근대 교육 기관으로 마산 지역에 자리 잡게 된다.

1894년에 호주 선교부에서 파송한 아담슨(Rev. A. Adamson)[한국명 손안로] 선교사는 마산에 성호리와 마산포 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교역자로 목회 활동을 하면서 한인 가옥을 사들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10여 명의 성도를 모아 청소년들에게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고 신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에서 독서숙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당시 마산의 새 교육의 시작이었다. 아담슨은 지역 유지, 교회 관계자들과 함께 적법한 학교로 인가 받기 위해 노력한 결과 1909년 8월 19일 당시 학부대신으로부터 사립 창신 학교로 인가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마산에 사립 중등 교육이 실시된 최초의 일이다.

1906년 5월 17일에 10여 명의 아동들로 시작한 창신 학교의 전신이 몇 년 사이에 인근 지역에서까지 몰려드는 학생들로 인해 교사를 확장하고, 민족주의 활동을 뚜렷이 하거나 그러한 의식을 분명히 지닌 교원을 충원해야 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1908년 9월 15일 창신 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대외적으로 학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당시 교명을 ‘창신(昌信)’이라고 정한 것은 옛날 문창리(文昌里)라는 이곳 지명에서 ‘창(昌)’을, 기독교 정신에 의한 믿음의 학교란 뜻에서 ‘신(信)’자를 따온 것이다. 이렇게 교명을 지명에서 따온 것은 이 고장에 신문명·신사상을 불어넣고 이곳을 개발하겠다는 선구자적인 의식과 장차 나라를 위하여 일할 일꾼을 키운다는 세대적 사명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과 봉사를 표방하는 기독교 정신을 널리 전함으로써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나아가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참된 민족의 역군을 기르고, 낡은 사회 질서를 개척하여 민주적인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동시에 자주 독립하는 적극적인 정신적 자세를 확립하려는 뜻이 깃들어 있었다.

당시 기울어가는 조국의 운명과 민족의 장래에 대한 염려로 마음의 영일이 없었던 애국적 인물 남승 선생과 안확 선생의 민족 교육 및 한글 교육은 이 고장의 항일 운동에 앞장서고, 교육을 통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을 배양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근대화하려는 뜨거운 민족의식의 고취에 있었다.

[강압에 굴하지 않는 민족혼의 제련소]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민간인에 의한 사립 학교 설립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된다. 1908년 전국적으로 근대 학교 수는 5,000여 개교였다. 당시 경남 지역의 사립 학교는 모두 163개 학교였다. 이처럼 사립 학교 설립 운동은 전국적인 현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적극적으로 학교가 세워졌다. 또한 사립 학교의 설립 정신은 모두가 개화 운동과 아울러 우리 사회를 근대화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해야겠다는 민족의식에서 출발하였다. 당시 장래에 자유 독립을 회복하고자 하거든 급히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진흥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였고, 언론 기관들도 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 운동 전개를 적극 후원하였다. 이 같은 사회적 배경에는 근대 학교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과 이를 통해 국권 회복이라는 구국 교육 운동 차원에 있었다.

이들 학교 중에서 국권 침탈 이전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서 민족 교육을 표방한 대표적인 사립 근대 학교가 창신 학교였던 것이다. 창신 학교의 교육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설립 공로자인 이승규의 항일 민족정신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1909년 12월 4일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청원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자 이승규는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일진회의 성명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창신 학교의 교육 목표는 교육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사용된 교과서 자료 중에서 현채(玄采)가 저술한 『유년필독(幼年必讀)』[후일 학부에서 판매 금지 조치] 제33과 애국본(愛國本)에서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교육 목적은 교육을 통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을 배양하고 우리 사회를 근대화하려는 뜨거운 민족의식의 고취에 있었다. 따라서 당시에 사용된 교과서는 대부분 애국심 고취를 내용으로 한 것이며, 교정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리었고 모든 모임에서 애국가가 불려졌다. 또한 조례의 훈화도 애국정신에 넘쳐흘렀으며, 토론회·강연회와 같은 교내외 활동에서도 정부를 공박하고 일본의 검은 손길을 통렬히 비난하였다. 이와 아울러 학생들의 체력 훈련을 특별히 강조하여 건강한 신체가 곧 외세를 이겨내는 힘의 근원이라고 가르치는 한편 학생들에게 엄격한 병식(兵式) 체조를 부과하여 절도 있는 생활과 건강한 체력을 연마하게 하였다.

이러한 창신 학교의 애국적 행위와 함께 보편적으로 언어 민족주의라고 하여 언어와 정신을 한 몸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우리 민족도 언어를 통하여 민족의 정신을 온전히 보전하고, 한글 교육을 통해 민족의 올곧은 정신을 미래에 이어나가고자 하는 노력 또한 멈추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창신 학교에서의 한글 교육은 민족주의 교육의 일환인 동시에 나아가서는 나라 말글 사업을 위한 검증 공간이 된 셈이다. 우리나라 근대 국학자로 평가되는 자산 안확이 최초 저술서인 『조선 문법』을 이곳에서 완성했고, 조선어 학회의 실질적 책임자 고루 이극로자산을 통하여 역사와 우리말을 배웠고, 주시경의 우리말 연구를 계승한 한결 김윤경이 한글과 역사 교육으로 학생들의 민족주의 정신을 바투 잡았고, 조선어 사전 편찬에 온힘을 쏟다 옥중에서 작고한 한메 이윤재 등이 민족 교육의 스승으로서 창신 학교에서 언어 교육과 역사 교육을 몸소 실천하였다.

[민족의 혼을 심은 창신 학교 스승들]

근대 학교로서의 창신 학교가 민족 언어 교육과 역사 교육을 실시하고 민족 학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창신 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의 활동상을 들 수 있다. 먼저 국권 회복단 마산 지부장으로 활동하였던 안확은 1911년 3월 이순상·이종성·나인환·김철두와 함께 창신 학교의 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개교 기념가의 작사·작곡, 7인조 악대 조직, 창신 학교 교가 작곡, 교표 고안 등이 있으며, 이 같은 교육 활동의 밑바탕에는 일제에 대한 항일 시위와 학생들에게는 국권 회복을 고무시킨다는 목표가 내재되어 있었다. 또한 1914년 마산에서는 처음으로 창신 학교에 축구부와 야구부를 조직하여 체육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 ‘문(文)’만 숭상할 게 아니라 ‘무(武)’도 갈고 닦아서 건강한 신체를 만들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수업 시작 전에 학생들에게 ‘대한제국 만세’를 외치게 했고, 1914년 5월 17일 개교기념일 행사로 추산정[현 마산 시립 박물관 근처]에서 시민을 위한 시국 강연회를 처음으로 열었고 이후 연중행사처럼 개최하였다. 그의 시국 강연회는 마산 지역민에게 민족 교육의 중요성과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는 애국 계몽 운동 차원에서 열렸으며, 마산 3·1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창신 학교의 민족 교육은 이 외에도 교사와 출신 동문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아래에서 우리말을 지키려는 조선어 학회 사건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윤재·김윤경창신 학교 교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이들은 모두 민족 교육을 내세워 언어와 역사 교육을 한 진정한 스승들이었다. 특히 이윤재는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에 참가하여 김해에서 합성 학교의 교사로 구국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고 학생들이 일본 말 흉내를 내면 야단 치고 종아리를 때리며 다시는 일본 말을 못하도록 엄하게 교육했다.

그가 창신 학교 교사로 있을 때 창신 학생들을 한 덩어리로 뭉치게 하고 창신의 얼을 깊이 새기게 하며 애교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문명의 선구자를 길러내기 위하여 교가를 지었는데 안확이 작곡한 것에 가사를 붙였다. 가사 내용의 핵심은 나라를 위한 위인과 열사의 배출을 염원하고 있다. 이처럼 이윤재창신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드높이는 민족 교육을 철저하게 강조하고 실천하였던 인물이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 폭파 사건 등을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의열단의 김원봉과, 조선어 학회 사건의 주역이었던 이극로, 병식체조를 통하여 독립운동의 길을 찾고자 노력한 현완준, 목아령 체조를 고안하여 단결심과 협동심을 길러준 현흥택 등도 역시 창신 학교에서 민족 교육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조선어 학회 사건의 주모자였던 이극로는 자신의 목숨보다 한글을 아끼고 나라의 문화 기둥인 우리말 사전 편찬에 일생을 건 인물이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 후반인 1939년에 창신 학교는 신사 참배 반대 등 항일 독립운동으로 폐교되었는데, 이를 보아도 민족 학교로서의 역할과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민족자주정신의 요람인 창신 학교에서는 지도하는 선생님과 배우는 학생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나라 잃은 설움을 극복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당시 교사들은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였고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나라사랑의 정신을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환경은 창신 학교를 자연스럽게 민족자주정신의 거점으로 만들었다.

[나오는 말]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근대 학교를 중심으로 이 학교가 추구하였던 근대 교육의 성격을 민족 교육과 함께 살피고, 마산 지역 창신 학교의 설립 과정과 창신 학교가 실시한 한글 교육과 보급, 민족 교육 운동의 강화를 통해서 조국 광복에 일익을 담당한 의미들을 되새겨 보았다.

이 시기, 민족 교육을 통한 후학 양성에 힘쓴 창신 학교의 학풍은 폐교 이후에도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창신 학교가 갖는 또 하나의 의미점은 바로 한글 교육을 통한 민족주의 저항 활동이다. 특히 현대 국어의 기본을 만든 이들이 창신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그들이 나중에 조선어 학회의 구심점을 이루어 『조선어 사전』을 편찬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제 강점기하의 창신 학교는 우리말과 글에 대한 얘깃거리의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창신 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저항 활동에 나선 이들을 상호 연결하는 일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안타까운 사실은 민족주의 저항 활동의 중심이었던 창신 학교 교사, 학생, 동문의 활약상이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과 신사 참배에 대한 연구가 부각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지역적인 문제로 봤다는 점과 함께 신사 참배를 민족 운동사적인 측면에서 보는 시각보다는 종교적인 측면을 우선시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민족주의 저항 활동과 신사 참배 반대 투쟁에 참여한 이들은 민족과 신앙을 분리하여 보지 않고 하나로 인식하였던 점들이 있다. 이런 것들을 제대로 규명한다면 신사 참배 반대 투쟁에 새로운 의미와 연구 성과들을 기대할 수 있을 듯싶다. 아울러 자신의 목숨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꺼이 헌신하신 분들의 애국적 행위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창신 학교에 대한 역사 기록물 정리와 함께 이들의 두드러진 활동을 알리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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