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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021
한자 倭城
이칭/별칭 웅천 왜성,명동 왜성,안골 왜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제장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웅천 왜성|명동 왜성|웅천 안골 왜성
양식 석성[웅천 왜성|명동 왜성|웅천 안골 왜성]
관련 인물 고니시 유키나가[웅천 왜성]|소오 요시토시[명동 왜성]|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다카[웅천 안골 왜성]
크기(높이,길이,둘레) 높이 3~8m, 길이 700~800m[웅천 왜성]|높이 1~2m, 둘레 365m[명동 왜성]|높이 8m, 길이 1,250m[웅천 안골 왜성
면적 1만 7,930㎡[웅천 왜성]|1만 9,208㎡[웅천 안골 왜성
소유자 오기호 외 28인[웅천 왜성]|진해구[웅천 안골 왜성]
관리자 진해구[웅천 왜성]|진해구[웅천 안골 왜성]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79호[웅천 왜성]|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75호[웅천 안골 왜성]

[정의]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군대가 현재의 창원[진해구]에 일본식 축성 기술로 쌓은 성곽군.

[개설]

왜성은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이 조선에 건립한 성곽으로 현재의 창원[진해]에는 웅천 왜성, 명동 왜성, 안골 왜성 등이 있다. 이 왜성들은 임진왜란 강화 기간 내내 웅천[현 진해]에 축조되어 일본군의 거점으로 활용되었으며 현재 유적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건립 경위]

왜성은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군수 물자를 보관하고 그 보급로를 확보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성곽이다. 일본이 축성을 결정하게 된 것은 1593년 2월 이후 서울에서 철수를 결정하면서부터였다. 즉 도요토미가 한성 철수 후 남해 연안에 성곽을 축성하여 각기 무기와 식량 등을 충분히 확보하여 장기적인 방어전에 임할 것을 지시한 데서 유래된다. 일단 성곽이 축성되고 나면 강화 교섭 중에 수비병을 제외한 병력을 일본 본토로 철수시켜 최소 병력으로 주둔을 지속할 수 있으며, 본토로부터 조선에 대한 보급도 그만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진해[웅천]에 축성한 왜성들은 부산 쪽으로의 조선 수군의 진로를 차단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확보하며, 일본 수군이 주둔한 항만을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함에 있었다.

[위치]

임진왜란 강화 기간 동안 축성된 왜성의 범위는 침략의 거점인 부산 본영을 중심으로 동은 서생포, 서는 거제도까지 각 성곽이 연결, 제휴하는 형태로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진해[웅천]에도 왜성이 축성되었는데 모두 진해만에 면한 지역에 위치하였다.

[형태]

왜성은 해안의 선착장을 포함하는 외곽부와 배후의 자그마한 산 위에 위치하는 내성부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부는 재료, 지형, 목적 등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동일한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조선에서 축조하였던 성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웅천 왜성 현황]

웅천 왜성진해구 남문동 남산에 있다. 1593년 4월 18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성에서 퇴각한 후 도요토미의 명으로 해발 188m의 웅천 남산에 형세가 웅장하고 규모가 광대한 이 성을 쌓았다고 하지만, 축성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가 웅천 왜성에 장기 주둔한 것은 사실이며, 그의 사위이며 대마도 주인 소 요시토시는 정유재란 당시 웅천 왜성을 다시 수축하였다고 한다. 요컨대 웅천 왜성은 고니시 및 소 요시토시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웅천 왜성에는 1593년 세스뻬데스가 입국하여 1년여 체류한 특별한 역사가 있다.

고니시가 남산을 택한 것은 지형상으로 해변에 돌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웅포만을 안고 있어 선박 수백 척을 정박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 때문이었다. 아울러 육로로도 상호 연락이 용이하고 해로도 마산, 거제, 가덕도, 안골포와 상호 연락이 용이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철수할 때 성에 불을 질러 내부 건물은 없어졌으나,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벽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왜성의 축성법과 규모를 엿볼 수 있다.

제포와 안골만 사이에 반도처럼 돌출한 남산의 정상부에 위치하면서 북쪽으로 웅포만을 포용하고 있어서 육로는 물론 해로로 안골포, 마산, 가덕도, 거제도와 연락이 용이할 뿐 아니라 일본과도 가까운 요지 중의 요지이다. 이 성의 아래에는 소 요시토시가 구축한 지성인 자마 왜성명동 왜성이 있었다고 한다.

전체적인 평면은 와성만 쪽을 향하여 남북 양익상으로 ‘V’자 상을 이루고 있다. 이 성의 북서쪽에는 웅천 읍성이 축조되어 있다. 웅천 왜성의 지성으로 자마산의 정상부와 능선에 자마 왜성, 진해시 명동 일원에 명동 왜성이 있다. 웅천 왜성의 범위는 동서 700m, 남북 약 500m에 걸친다. 현재 성곽은 부분적으로 잘 남아 있는 편이나, 석축 상층부는 무너진 곳이 많다. 넓이는 약 1만 6,500㎡, 둘레 1,250m, 높이 3~8m이다. 석재는 주로 현무암과 청석이며 최대 1.5×1.5×2m이다. 축성법은 대형의 면석을 상하로 고르게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우는 방법으로 지면에서 70° 정도의 경사각을 이루어 축성하였다. 자연석 또는 자연 할석을 이용, 잔돌을 끼워 난적 쌓기로 하였다.

웅천 왜성은 명·일 간에 강화 교섭을 가진 곳으로 알려져 있고, 1593년 12월 28일 스페인 출신의 세스뻬데스 신부가 당도하여 근 1년간 은거하면서 종교 활동을 전개한 곳이다. 이곳에서 세스뻬데스는 ‘조선에서 보내는 서신’을 작성하였다. 그의 제1서신에서 당시 건설 중이던 웅천 왜성에 대해 생생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고모가이성[웅천 왜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조만간 완성되리라 여겨지는 놀랄 만큼 거대한 방어 작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 모든 것은 잘 지어졌고 또한 거대합니다.”

[명동 왜성 현황]

창원시 진해구 명동 뒷산에 소재하고 있다. 임진왜란웅천 왜성의 지성으로 쌓은 석성이다. 일본 기록에는 지성이 두 군데 있었다고 하는데, 다른 지성이 있었던 자마산에는 성터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명동 왜성진해만의 동쪽 기슭과 거제만의 북쪽 기슭을 감시하여 남산의 본성에 보고하기 위한 수단으로 쌓았으리라 짐작된다.

성의 구조는 명동 뒷산의 멧부리를 두 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장방형으로 깎아 자연석으로 본성·외성을 쌓았으며 성석은 해안에 이르도록 줄지어 있다. 본성의 북쪽 500m 지점의 봉우리에 앞을 잘 내려다볼 수 있는 네모꼴의 보루를 두 곳에 쌓아 놓았다.

성석을 어디에 이용하였는지 성벽이 얼마 남아 있지 않고, 한때는 성터가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을 한 일이 있었고, 지금은 수목이 우거져 분별이 어렵다. 현재의 규모는 둘레 365m, 높이 1~3m이다.

[안골 왜성 현황]

진해구 안골동 동망산 173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가덕도와 수도(水島)를 바라보며 안골만 깊숙이 자리하면서도 안골 마을 북동편 배후 야산의 조망권이 탁월하며, 깊숙한 만에는 수백 척의 함선을 수용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때문에 조선시대 안골포 만호진 성지가 남아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 수군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 중의 하나였다.

1593년경 왜장 구키 요시다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이 구축하였으며, 이 후 세 장수가 번갈아 1년씩 교대로 수비한 일본 수군의 본거지였다. 동망산 산꼭대기[해발 100m]의 지형을 이용하여 본성을 중앙에 두고 북쪽으로 내성, 외성, 서쪽으로 외성을 쌓아 성 사이는 외곽으로 연락을 하게 되어 있다. 이성의 성벽의 높이는 4~7m이며, 좌우에 3자와 2자 간격을 둔 전형적인 일본식 산성이다. 이곳 천연의 지형 조건을 충분히 활용한 이 성은 앞면이 절벽에 면하고 있으며 뒤 쪽에 안골만이 있어 단시일에 축성한 산성이지만 완벽에 가까운 요새였다.

평면상으로 내해인 웅동만과 외해인 가덕수로 양쪽을 조망하는 동망산 산상에 4개의 곡륜군과 내해에 면한 산록의 주거 공간에 상당하는 곡륜군, 집락 지역 부분의 항만 시설을, 서쪽은 조선 수군의 안골포진 성벽을 이용해서 축성하였다.

안골 왜성의 규모와 축성 개요를 보면 규모는 남북 400m, 동서 1,000m, 넓이 약 1만 6,500㎡, 둘레 594m, 높이 4~5m로 석재는 현무암과 청석이다. 축성법은 대형의 면석을 상하로 고르게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우고 자연석 또는 자연 할석을 이용, 잔돌 끼워 난적 쌓기로 하였다.

안골 왜성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75호로, 일제 시대에는 ‘안골리성’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웅천 안골 왜성’으로 등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안골 왜성이 있는 산의 이름을 따서 ‘동망산 왜성’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초기 현재의 창원[진해구]은 일본군의 점령지에 들어 일본군으로부터 침탈을 당한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특히 강화 기간 중에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일본군은 이곳에 왜성들을 쌓아 장기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진해에 남아 있는 왜성들은 그만큼 임진왜란 시기 조일 양국에게 중요한 위치로 기능한 곳이 바로 진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