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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027
한자 科擧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배상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958년(광종 9) - 과거제 실시
폐지 시기/일시 1894년 - 과거제 폐지

[정의]

고려와 조선 시대에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

[내용]

과거제는 신라 시대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에서 그 시원을 찾기도 하나, 관리 선발의 제도로 처음 도입된 것은 고려 시대인 958년(광종 9)이었다. 고려 시대 과거제는 문관 시험인 진사과(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 기술 관료를 선발하는 잡과(雜科), 그리고 고려 말에 잠시 실시된 무과(武科)가 있었다.

초기 시험의 형식은 관리의 자제인 국학생과 지방 출신의 향공(鄕貢)을 막론하고 예비 시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본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러다가 1024년(현종 15) 12월 향공의 숫자를 주현(州縣)의 규모에 따라 1,000정(丁) 이상은 3인, 500정 이상은 2인, 그 이하 주현에서는 1인으로 제한하여 선발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계수관(界首官)이 주관하는 시험을 거쳐서 서울의 국자감시(國子監試)를 합격한 후 본 시험인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국자 진사(國子進士)·태학 진사(太學進士)·향공 진사(鄕貢進士) 등 진사 칭호를 얻었으며 본 고시에 나갈 수 있는 자격과 함께 사(士)로서 대우 받았다.

고려 시대 과거는 시험관인 지공거(知貢擧)와 합격자 사이에 좌주(座主)와 문생(門生)의 관계라 하여 특별한 유대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1369년(공민왕 18) 원나라의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의 형태로 바뀌면서 국왕의 영향력이 커지서 고시관의 역할이 축소되었다.

창원에서 급제한 인물로는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진 공소(孔紹)의 손자 공부(孔俯) 등이 있다. 공부는 1376년(우왕 2) 과거에 급제하여 전의부령(典儀副令)과 예조 총랑(禮曹摠郞)을 거쳐 집현전 태학사를 역임하였다.

조선 시대 과거는 문과(文科)와 무과(武科), 그리고 잡과(雜科)로 실시되었다. 문과시험의 1단계는 생진과(生進科)[사마시(司馬試) 또는 소과(小科)라고도 함]라 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으로 시험을 보는 생원과(生員科)와 문예(文藝)로 시험을 보는 진사과(進士科)가 있었다. 또한 생원·진사나 성균관 유생들이 응시하는 대과(大科)는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 3단계를 거쳐 실시되었다.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에서 초시는 서울과 지방에서 양반 자제나 양인·향리의 자제 등이 응시할 수 있었으며, 그 합격자가 서울에서 복시를 보았다.

창원 출신으로 급제한 인물로는 최윤덕(崔潤德) 등이 있다. 최윤덕은 1394년 무과에 급제한 후 북방으로 4군 설치의 기초를 닦았고, 남쪽으로 왜구의 소굴이 되었던 대마도 정벌에 앞장서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도산리에서 생을 마감한 김명윤(金命胤)은 1583년 과거에 급제한 후 파주·충주·진주·홍주·제주 등지에서 목사를 역임하고 임진왜란 기간에 세운 전공으로 선무 원종 일등 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과거의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 최고의 점수를 취득한 자를 장원(壯元)이라 하고, 급제자들에게는 홍패(紅牌)가 수여되었다. 잡과는 기술관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예비 시험이나 전시 없이 초시와 복시만으로 실시되었는데, 역과(譯科)·의과(醫科)·음양과(陰陽科)·율과(律科) 등이 있었다.

과거는 3년에 한 번씩 보는 식년시(式年試)를 기본으로 하였다. 하지만 국가의 경사(慶事)와 같이 특별한 경우에는 임시로 시행되기도 하였는데, 왕의 즉위나 궁궐의 낙성 등을 기념하여 실시되는 증광시(增廣試), 왕이 성균관의 문묘에 참배한 뒤 실시하는 알성시(謁聖試), 시골 유생들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실시되는 백일장(白日場) 등이 그것이다.

[변천]

과거제가 처음 도입된 것은 고려 958년(광종 9)이었다. 초기에는 본과에 바로 응시하도록 하였으나 1024년(현종 15)부터 주현(州縣)의 규모에 따라 인원을 제한하여 예비 시험을 실시하였다. 1369년(공민왕 18) 원나라의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의 형태로 바뀌어 국왕의 영향력이 커지고 고시관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한편 조선 시대 과거제는 1894년 성균관을 근대적 교양을 가르치는 학교로 개편하면서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과거는 고려~조선 시대 시험을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대표적인 제도였다. 고려조의 과거제는 가문이나 혈통을 기준으로 관리를 등용한 음서제(蔭敍制)와 달리 개인의 실력에 의해 관인을 선발하는 방식으로, 고려 사회를 관료제(官僚制) 사회로 보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조선 시대에서 과거는 양반사류(兩班士類)로 진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법적 근거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오를 만큼 성장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을 높은 교육열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제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폐지될 때까지 고려~조선조에 걸쳐 900년 이상 일반 백성들의 교육열을 추동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런 만큼, 오늘날 한국인이 보여주고 있는 교육열의 배경에도 과거제의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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