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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037
한자 石頭倉
이칭/별칭 회원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합포동|마산회원구 회원동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신은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할 지역 석두창의 관할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합포동 지도보기|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동지도보기

[정의]

고려 시대에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던 조창.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원활한 세곡(稅穀)의 운송을 위해 전국 주요 항구에 12개의 조창을 설치했다. 이때 합포[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도 석두창(石頭倉)을 설치했다. 각 창에는 판관(判官)이 파견되어 세곡 운송을 관장했다. 충렬왕회원창(會原倉)으로 개칭되었다.

[내용]

석두창은 인근의 김해, 함안, 칠원 등지의 세곡을 거두어 집산하였다가 이듬해 2월 조운선을 출항시켜 5월까지 개경에 세곡을 납부했다. 고려시대 광종(光宗) 때 각 포구의 운반비를 결정하면서 석두창의 경우 5석당 1석으로 했다. 정종(靖宗) 때에는 각 조창에 조운선의 수를 정했는데 석두창에는 1,0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6척의 초마선(哨馬船)을 배당했다.

[변천]

무인집권기를 거치면서 국가의 조운 체계가 동요했다는 연구를 참조하면 이 때 석두창 역시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당시 석두창에는 여전히 많은 세곡들이 집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삼별초합포를 공격한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다. 한편 일본 원정이 단행되던 충렬왕 때, 석두창은 일본 원정에 소요되는 물자를 보관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고 규모도 더욱 확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두창은 1350년 6월 왜구들이 합포영회원현을 불사를 때 큰 타격을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이곳의 조창은 왜구의 노략질의 대상이 되어 1377년(우왕 3) 왜구들이 회원창(會原倉)을 약탈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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