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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포 개항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049
한자 馬山浦開港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윤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6년 - 동래 부산포 개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80년 - 덕원 원산포 개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83년 - 인천 제물포 개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 조운 폐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7년 - 증남포, 목포 개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8년 5월 - 마산포 개항 결정, 신월동·월영동 일대 공동 조계지 설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9년 5월 1일연표보기 - 조계지 인도. 마산포 개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9년 5월 22일 - 창원항 재판소, 전보사, 우체사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9년 5월 - 부산 영사관 마산 분관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0년 3월 - 러시아와 함대 전용 조차지 협정 체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0년 4월 - 부산 영사관 마산 분관, 마산 영사관으로 승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0년 6월 - 율구미 호약 체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2년 - 마산포 전관 일본 거류지 협정 체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5년 - 마산포 수출입 급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5년 11월 - 을사조약 체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6년 2월 - 일본 영사관이 이사청으로 바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6년 9월 - 창원 감리서 폐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1년 1월연표보기 - 마산포 개항장 폐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4년 - 각국 공동 조계지 해제, 마산포 개항장 지위 상실

[정의]

1899년 창원의 마산포를 외국인에게 개방하여 거주와 무역 등을 가능하게 한 사건.

[1876년 최초의 개항과 개항장의 확대]

1876년 일본과 수호 조규를 체결하고, 1880년대에 들어와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과 잇따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은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호를 열게 된다. 문호의 개방은 1876년 동래의 부산포, 1880년 덕원의 원산포, 1883년 인천의 제물포 등의 개항과 더불어 무역의 확대되었고 외국 문물의 도입으로 이후 한국 사회가 크게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개항은 한국의 의지보다는 열강의 요구에 따른 측면이 컸지만 이후에는 한국 사회 내부에서도 개항장·개시장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늘어나고 있었다. 결국 열강의 세력균형을 위해 교류를 확대하려는 정부의 정책과 무역 확대에 따른 이익을 노린 외국의 요청이 거듭되면서 1897년에 증남포와 목포를 추가로 개항한 데 이어 1898년에는 마산포 등의 개항이 추진되었다.

[1899년 마산포 등의 개항]

1898년 5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은 각국 공사에게 마산포, 군산, 성진의 개항과 평양의 개시(開市)가 결정되었음을 통고하였다. 또한 창원 부윤 안길수(安吉壽)로 하여금 감리 서리를 겸무하면서 개항과 창원 감리서 설치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창원 감리는 마산포로부터 약 5리에 있는 창원부 외서면의 신월동월영동 일대 약 13만 여 평을 구획하여 각국 공동 조계지로 설정하고 1899년 5월 1일 이를 각국 대표자인 부산 세관장 스카글리오티(A. Scagliotti)에게 인도함으로써 마산포의 개항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6월 2일에는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 각국 공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마산포 각국 공동 조계 장정이 조인되었다.

[일본과 러시아의 단독 조계지 설정]

마산포의 개항을 전후하여 러시아는 남해안의 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마산포에 동양 함대를 위한 조차지를 설정하기 위해,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갈등을 빚고 있었다. 때문에 러시아와 일본은 마산포의 토지를 매수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고, 그 결과 마산포 공동 조계지의 경매가 열기를 뿜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개항장에는 없는 러시아와 일본의 단독 조계지가 마산포에 설정되기도 했다. 즉 1900년 3월 러시아는 한국 정부와 ‘마산포 부근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 전용 조차지에 관한 협정’ 이어 6월에 ‘율구미 호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여 공동 조계지에서 조금 떨어진 율구미 일대 약 30만 평의 토지를 사들여 단독 조계를 가지게 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일본도 1902년 5월 ‘마산포 전관 일본 거류지 협정’을 체결하여 월영리·자복포 일대에 약 30만 평의 단독 조계를 확보하였다.

[마산포의 개항에 따른 관청 설치]

마산포의 개항에 따라 개항장 사무를 담당하는 감리서는 물론이고 세관, 우체사, 전보사, 재판소, 각국 영사관 등 근대적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는 1899년 5월 22일 칙령 제21호로 창원항 재판소를 설치하여 개항장인 마산포와 창원 지역의 재판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고, 같은 날 칙령 제24호, 제25호로 창원 전보사 1등사와 창원 우체사 1등사를 설치하여 전보와 우편 업무를 맡게 하였다. 개항과 동시에 부산 세관 마산 출장소도 설치되어 부산 세관에서 근무하던 독일인과 일본인이 각각 주임과 보조로 일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마산포 개항 직후인 1899년 5월에 서둘러 부산 주재 일본 영사관 마산 분관을 설치하고 대리 영사[川上立一郞]를 두었다가, 1900년 4월 마산영사관으로 승격시키고 영사[坂田重二郞]로 하여금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러시아도 1900년 3월 소코프(S. Sokoff)를 마산 부영사로 임명하여 창원 개항장에서의 영사 업무를 시작하였다.

[무역의 확대와 일본인 이주]

1894년 조운의 폐지로 타격을 입었던 마산포는 1899년 개항 이후 외국 무역의 확대와 더불어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마산포 개항 초기에는 수출액이 8천 엔, 수입액은 2만 엔 정도였고 이후 조금씩 증가하여 오다가 1905년에는 수출 14만 엔, 수입 44만 엔으로 급증하였다. 당시 마산포의 수출품은 거의 대부분 곡물이었다. 1908년에는 쌀·보리·콩 등 곡물의 수출이 전체의 74%를 차지하고 있으며, 1909년 역시 80%에 달했다. 수입품으로는 면포나 면사 등 면제품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설탕, 석유, 성냥, 무쇠 등 생활 용품과 일부 사치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입품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었는데 오사카[大阪]에서 3분의 2, 도쿄[東京]에서 3분의 1 가량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처럼 1905년을 전후해서 마산항의 무역량이 크게 늘어난 것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삼랑진-마산 철도가 개통되면서 일본 상인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일본인들의 이주가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감리서 폐지와 개항장 폐쇄]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열강에게서 한국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작업을 본격화하였다. 1905년 12월에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이를 근거로 1906년 1월부터 서울, 인천, 부산, 마산 등지에 통감의 지휘 감독을 받는 이사청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각 개항장에 있던 감리서와 일본 영사관이 폐지되고 그 권한과 업무가 이사청으로 넘어갔다. 마산포에서는 1906년 2월 일본 영사관이 이사청으로 탈바꿈하여 업무를 시작하였으며, 9월에 초대 이사관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이 취임하고 칙령 제47호로 종래 창원 리가 취급하던 업무 중 외교 관계 업무는 마산 이사청 이사관에게 인계하며 기타 업무는 창원부윤에게 인계함으로써 개항과 함께 개설되었던 창원 감리서가 폐쇄되었다. 한편 일본은 진해에 군항 건설 공사를 본격화하면서 1911년 1월부터 마산포 개항장을 폐쇄하고 1914년에는 각국 공동 조계지도 해제되면서 마산포는 개항장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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