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6233
한자 鎭海安骨倭城
이칭/별칭 안골포왜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302-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주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진해 안골왜성 축성
문화재 지정 일시 1998년 11월 13일연표보기 - 진해 안골왜성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75호 지정
현 소재지 진해 안골왜성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302-2 지도보기
성격 산성
크기(높이,길이,둘레) 594m[둘레]|4~7m[높이]
면적 63,577㎡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75호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 있는 왜성.

[개설]

진해 안골 왜성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302-2 일대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전략상의 요충지로 1593년(선조 26)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등이 성을 구축하고 1년씩 교대로 수비한 일본 수군의 본거지였다. 이순신의 조선 함대가 1592년 7월 10일 구키 요시타가·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일본 제2의 수군 부대를 격파한 안골포 해전이 벌어진 장소이기도 하다.

진해 안골 왜성은 동쪽의 부산 왜성으로부터 20㎞, 남쪽의 가덕 왜성과는 4㎞, 서북쪽 웅천 왜성과는 약 3.5㎞ 거리에 있다. 이들 왜성은 서로 연계하여 가덕수로와 외해를 동시에 확보하는 위치에 축성되어 있다.

[건립 경위]

경상남도 남부 연안 지대에 왜성이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3년 사이의 일이며, 축성 배경에는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의 활약이 있었다. 일본군은 1592년 5월 이후 부산포 서쪽 해상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 의해 여러 차례 참패하였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수군의 원호와 보급 기지 확보를 위해 남부 연안부의 항만에 성을 쌓았다.

이에 대한 최초의 지령은 견내량 해전 직후인 1592년 7월 16일에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축성 위치로 항만을 택한 이유는 첫째 일본군의 항만 이용과 방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조선 수군의 항만 사용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군대에 있어서의 항만은 무기·탄약·병력·식수·식량 등의 보급은 물론 함대의 집결과 편성 등에 있어 불가결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진주성이 함락된 직후인 1593년 7월경부터 왜성이 본격적으로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진해 안골 왜성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302-2 일대에 위치한다.

[형태]

진해 안골 왜성은 둘레 594m, 높이 4~7m, 전체 면적은 6만 3,577㎡이다. 남북 400m, 동서 600m으로 구릉 위에 나란히 네 개의 곡륜군(曲輪群)과 이에 연달아 있는 토루(土壘)[외부와 분리하기 위해 흙으로 쌓아 만든 시설물]로 구성되어 있다. 성벽은 자연석과 거친 자연 할석을 이용하여 쌓았다. 성벽 우각부의 축조는 긴 면과 짧은 면을 서로 엇갈리게 조합하는 엇갈려 쌓기와 입석의 모서리를 맞추어 쌓는 세워 쌓기를 사용한 것이 확인되며 호구에는 경석이 사용되었다.

[현황]

진해 안골 왜성은 전형적인 일본식 산성으로, 지금도 갈지 자[之] 형태의 성문과 성벽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1998년 11월 13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천연의 지형 조건을 충분히 활용하여 조망이 탁월하며, 깊숙한 만에는 수백 척의 함선을 수용할 수 있었다. 앞면이 절벽에 면하고 있으며 뒷쪽에는 안골만이 있어, 단시일에 축성한 산성이지만 완벽에 가까운 요새였다. 때문에 조선 시대에 조성한 안골포 만호진 성지(城址)가 남아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 수군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 중 하나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