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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7034
한자 卞相泰
이칭/별칭 석당(石塘), 경제(景齊), 교재(敎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형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9년 10월 11일연표보기 - 변상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변상태 비밀결사 대붕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변상태 조선국권회복단 결성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변상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8일 - 변상태 진동 고현 장날 만세운동 참가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8일 - 진동 고현 장날 만세운동 발발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 - 변상태 삼진 의거 참가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 - 마산 삼진 의거 발발
활동 시기/일시 1944년 - 변상태 고려 구국 동맹 조직
몰년 시기/일시 1963년 11월 2일연표보기 - 변상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 - 변상태 대통령 표창 수상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변상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변상태 출생지 - 경남 마산
묘소 변상태 묘소 - 창원시 양촌리 지도보기 선영(先塋) 간원원(艮坐原)
기념비 지사석당변상태선생기적비(志士石塘卞相泰先生紀蹟碑)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암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변상태(卞相泰)[1889~1963]는 부산상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최기백, 성학년 등 6명의 동지와 함께 조국 광복을 위해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대붕회(大鵬會)’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시작하였다. 1915년 국내의 독립 세력을 확장하고 해외의 독립 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최후로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 국권 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17년에는 윤상태, 남형우, 안희제, 박중화 등 50여 명의 동지들과 비밀결사 ‘대동 청년단(大同靑年團)’을 결성하였다. 또한 1919년 4월초 상해의 임시정부에 군자금 1만 5,000원을 송금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9년 2월 23일경 대동 청년단의 이시영, 김관제 등과 함께 상경(上京)하여 서울 삼일 만세 운동에 참가한 뒤 경남 서부 지역의 중책을 맡고 귀향하여 독립운동의 거사를 도모하였다. 이광우, 김재화 등과 진주 의거를 계획하였으며, 신종목과는 거창 의거를 협의하였다. 3월 중순에는 함안군 군북면 사촌(舍寸) 조용태의 집에 머물면서 군북 의거를 준비하고 지휘하였다. 3월 하순 고향인 진전(鎭田)으로 와서 동지 권영대, 권태웅, 권태선, 백승인, 황태익 등과 함께 중종 선실(中宗先室) 일친재(日親齋)에서 4월 3일의 삼진의거를 계획하고 우선 3월 28일의 고현 장날 만세 운동을 도모하였다. 동지들과 은밀히 태극기를 제작하고 ‘아왈동포 유진무퇴(我曰同胞 有進無退)’라는 격문을 판각하여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선전물을 등사하는 등의 거사 준비를 하였다.

3월 28일 고현 장날, 권영대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600여 명의 군중은 일본군 헌병 주재소가 있는 진동을 향해 시위 행진을 하였다. 이에 헌병 주재소는 마산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포병 대대와 진해 요항부(要港部) 소속 경비대에 지원요청의 급보를 띄웠다. 급히 도착한 일분군은 무자비하게 총칼을 휘둘렀다. 오후 5시까지 진행된 만세 운동은 잔학한 일본군의 탄압에 피로 얼룩졌다. 이날 11명의 시위 주동자들이 검거되었다. 그는 권영대, 권태용 등과 함께 피신하였다가 4월 3일의 삼진 의거를 도모하였다.

4월 2일 오후 변상섭, 권영대와 함께 진전면 양촌리 토지 개간장에서 2백여 명의 농민들에게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의 정당성을 연설하며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배포하자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다짐하였다.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의 둑에 2천여 명의 군중을 향해 “오늘부터 우리는 자유민족(自由民族)이며 자유국의 국민(國民)이다. 일본의 간여는 추호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고 외치며 시위 군중을 이끌고 일본 헌병 주재소가 있는 진동으로 향하던 중 진북면 지산리 사동천 다리에 이를 무렵 진동면진북면에서 합세하였다. 시위대 군중은 무려 7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오후 3시경 사동천 다릿목에서 마산에서 증파된 헌병 포병 대대와 대치하였다.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총격을 가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던 김수동 등 8명이 일본군이 쏜 총탄에 순국(殉國)하였다. 변상태는 1920년 10월 30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한 혐의로 징역 2년형의 궐석재판을 받았고 1922년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4년 진주에서 이주현, 구여순, 장두관 등과 함께 ‘고려 구국 동맹’을 조직하여 독립 운동에 진력하였다.

[묘소]

묘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양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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