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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에는 왕희지, 웅천에는 홍희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11180
한자 晉-王羲之-熊川-洪羲之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정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8년 - 「진나라에는 왕희지, 웅천에는 홍희지」 『진해 스토리』에 수록
성격 전설
주요 등장 인물 홍희지|국왕|과객
모티프 유형 과거급제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전승되는 전설.

[채록/수집 상황]

『진해 스토리』[진해시, 2008]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풍호동 찬샘골에서 정조 8년인 1784년에 태어난 홍희지는 서당과 향교에서 수학하며 글이나 말재주가 뛰어나 고을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지역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떳떳하게 웅천 고을을 내세워 응시를 하였다. 워낙 문장이 탁월하여 여러 차례 초시에는 합격하였다. 그러나 회시에는 미치지 못하여 보통 사람이라면 체념을 하겠지만 그는 늙음을 잊고 공부를 하면서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 1859년에 증광시가 있었다. 그때 나이는 75세였다. 체력으로 보아 마지막 기회라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상경을 하였다. 과장에서 시제를 보는 순간 영감이 번뜩였고 그는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생애를 걸고 한 과거 공부를 늘그막에라도 빛을 볼 수 있게 되리라 믿었고 여생은 향토 후진들이나 길러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또다시 급제자 명단에 그의 이름 석자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지역 차별, 그는 자기도 모르게 통곡이 나왔다. “아이고 아이고! 웅천 고을에 태어난 것이 죄란 말인가? 아이고 아이고!” 폐부를 찌르는 때 아닌 통곡 소리는 시관들의 시선을 모았고, 마침내 왕이 초지를 가져오게 분부하였다. 시권을 본 왕은 “허허! 명필이로고 중국에는 고지 왕희지라 하더니, 조선에는 금지 홍희지로구나.”하며 감탄하였다. 그래서 그는 합격자의 대열에 올랐고 사마방목(司馬榜目)에는 웅천 사람 홍희지의 이름 석 자가 오늘날까지 선명하게 전하고 있다.

그런데 합격은 하였으나 한 가지 걱정은 집으로 돌아올 노자가 부족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강원도의 어느 문중 부호가 삼현육각을 앞세워 귀향을 도왔다. 이 일행이 먼저 당도하여 쉰 곳이 지금의 대야동이었고, 이 경사스러운 급제를 축하하는 도문잔치는 자은동의 암자골에서 베풀어졌다.

또한 홍희지는 재담을 잘 하기로 유명해 한양으로 회시를 보러 가면서 대구의 어느 집에 과객으로 들렀을 때의 일이다. 다른 과객과 수인사를 나누는데, “소생은 웅천을 안태본으로 하는 홍희지올시다.” “아하! 예 해우창생(海隅蒼生)[바다 한쪽 구석에 사는 상스러운 백성이라는 뜻]이로군요!” 하며 한 과객이 그를 조롱하는 것이었다. “예! 그러나 대구는 웅천의 소산인 줄 아옵니다.” 웅천 앞 바다에 대구(大口)가 많이 잡히던 때라 이렇게 응수를 하며 내 아들과 같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청도에서 온 한 문객이 “해우창생인 주제에 너무 거만하지 않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청도는 대구 알 아래이렸다.” 하며 이번에는 이렇게 하대로 응수하여 내 손자와 같음을 암시하였다. 듣고 있던 집 주인은 바닷가 웅천 고을 사람들이라고 멸시하였다가 재치 있는 응수로 공격을 당하는 두 문객이 안타까워 시비가 되기 전에 만류를 하였다.

회시를 치르고 웅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충청도 회덕 고을에서 날이 저물어 또 어느 집에 과객으로 들르게 되었다. 방안에 들어서니 먼저 와 있던 문객들이 일제히 “해우창생 반갑소이다.” 하며 반기니 사랑지기는 또 부엌으로 가 “해우창생 한 상이오.”하며 밥 한 상을 더 차리게 알렸다. ‘해우창생’이란 말을 처음 듣는 부엌데기들이 무슨 짐승이 들어 온 줄 알고 나와서 사랑채로 가 문 밖에서 수군거리며 문구멍을 내어 해우창생을 찾아보려 했다. 그런 기미를 알아챈 그는 “해우창생 여기 있네.” 하며 방문을 활짝 열었다.

[모티프 분석]

「진나라에는 왕희지, 웅천에는 홍희지」 이야기는 진해 지역의 홍희지라는 인물이 과거에 급제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그의 재담으로 짜여 있다. 여기에 진해의 옛 지명인 웅천에 대한 자부심과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주된 원인이 지역 차별에 있음을 환기시킴으로써 당시 인재 선발에 대한 불합리성을 제기하고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센*** 인녕세요이빛나입니다환지를네습니다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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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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