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0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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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啓蒙 運動 |
이칭/별칭 | 실력 양성 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배병욱 |
[정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을 목표로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에서 전개된 문화적 실력 양성 운동.
[개설]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고 일제의 침략이 점점 노골화되자, 의병 운동과는 달리 개화 자강 계열에서는 실력 양성에 의한 국권 회복을 이루고자 하였는데, 이를 애국 계몽 운동이라 한다. 경상남도 거창에서는 국채 보상 운동, 학회 운동, 상소 운동, 대중 운동의 사례들이 보인다.
[을사늑약에 대한 지역민의 반응]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여 외교권을 강탈하는 등 본격적으로 대한 제국에 대한 식민지화 작업에 나섰다. 이에 따라 거창 지역에서도 친일파 군수가 임명되었고, 거창 경찰서와 거창 재판소가 설치되어 행정·치안·사법권이 장악되는 등 일제의 전면적 지역 지배가 강화되어 갔다. 특히 각 면의 면장을 통해 징세하는 방식과 전신·우편의 보급은 지역을 장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유지 세력을 동원하여 ‘지방 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징세 업무를 철저히 하려 하였고, 강제 병합 후에는 이들을 지역에서 협력자로 삼아 통치의 편리를 도모했다.
한편, 이러한 일제의 노골적 침략 행위에 대해 지역민들은 의병 전쟁을 통해 적극적으로 맞서거나 소위 ‘을사오적’으로 지목된 이들을 암살함으로써 그 부당함을 폭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무력에 의한 전쟁과 보복 행위보다, 서구적 근대화를 통해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는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그리고 독립 협회 운동으로 이어지는 개화 자강 계열의 운동을 계승한 운동이다. 급진적이고 즉각적 행동을 추구하는 전자에 비해 점진적 운동 방식인 후자를 흔히 ‘애국 계몽 운동’이라 한다. 이는 근대 국민 국가로의 이행 과정을 보여 주는 단서이기도 한데, 한말 거창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보인다.
[경제 구국 운동]
일제는 막대한 차관을 대여하여 한국 경제를 예속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에 근대 사회의 국민적 모금 방식에 의해 국채를 갚고 경제적 예속 상태로부터 탈피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1907년 2월 16일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은 거창에도 파급되었다. 3월 18일 최수교(崔守敎)가 50전을 기부한 내역이 『황성신문』에 보도된 것이 최초의 사례이다. 이어 거창군 웅앙면 산포리의 부인 17명이 19원 80전을 보내왔다는 소식도 4월 13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
[교육 구국 운동]
교육 구국 운동은 한말 애국 계몽 운동의 핵심으로, 을사늑약 후 대한 자강회, 서우 학회 등 여러 학회와 계몽 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어 운동을 이끌어 갔다. 거창의 이병태는 서북 학회의 회보인 『서우』에 1907년 8월 논설을 게재하여 서양 학문을 익혀 주권을 지키자고 주장하였다. 이즈음 항교가 거창 소학교로 개편되자 자녀들에게 신학문을 배우게 하려는 열기도 뜨거워졌다.
[정치 구국 운동]
을사늑약 직후 거창의 거유 곽종석은 고종 황제에게 4차례 상소를 올려 만국 공법에 따라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어 2천만 백성들과 함께 종묘사직을 위해 죽을지언정 일본의 신하나 포로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이는 유학자로서는 드물게 서양 열강을 존중하고 힘을 빌릴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거나, 근대 국민 국가 체제에 대한 이해를 갖춘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 1910년 3월에는 거창의 전 도사(都事) 이현규(李鉉奎) 등 지역민 49명이 ‘합방 반대’ 국민 대연설회를 열어, 지난해 ‘한일 합방 성명서’를 발표한 일진회를 성토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근대적 국민이 창출되는 과정이 거창 지역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