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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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山 泛菊會 |
이칭/별칭 | 중양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어인길 5[용산리 15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용균 |
설립 시기/일시 | 1636년 - 용산 범국회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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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636년 - 용산 범국회 활동 중단 |
이전 시기/일시 | 1898년 - 용산 범국회 모임 계승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1년 - 용산 범국회록 발간 |
최초 설립지 | 용산 범국회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155 |
현 소재지 | 용산 범국회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155 |
성격 | 시민 단체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에 있는 정온이 조직한 유교 단체.
[설립 목적]
정온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이 성리학을 연구하고 향약을 제정, 실천하고자 조직하였다.
[변천]
용산 범국회는 1636년 정온(鄭蘊)[1569~1641]이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에서 조직한 유생들의 모임이다. 정온은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출신의 중앙 관리로 광해군 때 폐모 사건을 비판하여 10년간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중용되어 벼슬이 대사헌, 도승지에 이르렀다.
용산 범국회가 조직된 계기는 정온이 가북면 용산에서 시묘를 산 데서 비롯되었다. 정온은 62세 되던 해인 1631년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가북면 용산 뒷산에 장사지내고 3년간 시묘를 살았다. 이때 정온이 지은 제실이 용천 정사였다. 정온은 당시 조야에서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용천 정사로 그를 방문하는 유생들이 많았다. 이에 정온은 원근의 유생들로 이곳에서 용산 범국회를 조직하였다.
용산 범국회는 1636년(인조 14) 9월 9일 중양절에 조직되었다. 이 때문에 범국회를 중양회라고도 불렀다. 범국회에 참가한 인물들은 다섯 개 군에 걸쳐 수십 명에 달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조정립, 임진부, 정백, 신순몽, 이응백, 문성후, 변창후, 김상견, 조시량, 이호, 김익견, 이난미, 최후원, 이봉일, 곽홍규, 신여량, 이수장, 정필달 등 이른바 ‘18선’이었다. 범국회의 설립 목적은 학문 교류를 통한 수행과 향약 실시를 통한 풍속 교화였다.
정재성의 발문에 따르면 “서리가 내려 만물이 시든 때 국화만이 홀로 향기를 내뿜듯이 천고지사(千古志士)의 뜻을 기리고, 서로 도의를 주고받아 향약을 설치하고, 강신회(講信會)를 열어 스스로를 수양하여 뛰어난 경지에 이르고자 함[修己達人]이었다.”
범국회 인물들은 인근 낙모대에서 강회를 열고 향약을 설치했으나 그 활동은 곧 중단되었다. 범국회가 조직되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범국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정온은 남한산성에 들어가 척화를 주장하였다. 조선이 청에 항복할 때 스스로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자 낙향하여 거창군 북상면에 있는 모리에 은거했다. 이후 모임은 중단되었으나 척화신으로서의 정온의 명성은 점차 높아졌고 용천 정사를 중심으로 한 유생들의 활동도 계속되었다. 그로부터 250여 년이 흐른 후인 1898년, 정태호, 정재성, 김준 등을 중심으로 용산 범국회를 계승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후예들이 모임을 계승하여 1912년 비문을 세우고, 1931년 『용산 범국회록』을 발간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거창 지역의 오랜 유교적 전통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