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129 |
---|---|
한자 | 居昌 少年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병욱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에 있었던 소년 운동 단체.
[개설]
거창 소년회는 1927년 거창 청년회의 지원 아래 설립되어, 소년 조선 지사 운영, 소녀부 병설 등 의욕적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로부터 집회 금지 등의 탄압을 받으면서 1930년 거창 소년 동맹으로 전환되어 지역 사회에서 더욱 확고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설립 목적]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소년층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주역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3·1 운동 후 기독교, 천도교 등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소년회는 1925년 이후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념적으로 분기되었다. 전국 소년 단체의 연합체인 조선 소년 연합회는 1928년 사회주의자들의 주도 아래 조선 소년 총연맹으로 개조되었다. 거창 소년회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1927년 거창 청년회의 지원 아래 설립되었다가, 1930년 거창 소년 동맹으로 전환되었다. 그 사이 일제 경찰로부터 집회 금지 등의 탄압을 받았음을 볼 때, 실력 양성론의 차원에서 벗어나 민족의식과 계급 의식을 가지고 식민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실천의 장으로서 조직되었다고 추측된다.
[변천]
1927년 2월 17일 밤 거창 청년 회관에서 『동아 일보』·『중외 일보』 거창 지국과 거창 청년회의 후원으로 4백여 명의 관객이 운집한 가운데 거창 소년회 창립 기성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4월 24일 오전 10시 거창 청년 회관에서 창립 선언을 하였는데, 위원으로 총무부 서진호(徐晋浩), 서용수(徐龍洙), 교육부 장영희(章榮熙), 권점암(權點岩), 체육부 배상운(裵尙云), 박성기(朴聖基), 조사부 강성우(姜聖禹), 이장현(李章鉉), 재무부 박금룡(朴金龍), 김수옥(金壽福) 등이 선임되었다.
1928년 1월 7일 오후 3시 거창 청년 회관에서 거창 소년회 소녀부 창설 총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4월 13일에 거창 청년 동맹 회관에서 제6회 정기 대회를 개최하여 조직의 해체와 소년 동맹으로의 전환을 의결하였다. 집행 위원장 권진홍(權鎭弘), 위원은 신중달(愼重達), 서진호, 유진동(兪鎭烔), 박성기, 이장현, 강성우, 이판금(李判金), 신중우(愼重宇), 신명재(愼命縡), 오봉석(吳鳳石), 검사 위원장에 신쾌봉(愼快鳳), 위원 서용수, 김삼판(金三判), 대의원 권진홍, 서용수, 신종(愼鍾) 등이 피선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7년 11월 26일, 27일 양일간 거창 소년회 주최로 제4회 남조선 소년 소녀 현상 문예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모집 분야는 조선문 작문과 습자, 동시, 도화, 수공 등이었는데, 총 5백여 점이 출품되었고 관람자가 수천에 달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2등과 4등 작품은 불온한 점이 있다고 경찰에 압수당하였다. 1928년 2월 25일 오후 2시 거창 청년 회관에서 임시 총회를 열어 회칙 개정, 회원 정리, 입회금 정리, 소년 조선 지사 설치, 창립 1주년 기념행사 건 등에 관해 의결하였다. 또 창립 1주년인 4월 24일에는 오후 3시 거창 청년 회관 강당에서 축하식으로 토론회와 음악회를 열고 제1회 정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1929년 2월 5일 임시 총회를 개최한 후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는데 이는 경찰 당국으로부터 집회 금지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1년 후인 1930년 4월 4일에 집행 위원회를 연데 이어, 4월 13일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정기 대회를 개최하여 소년 동맹으로의 전환을 의결하면서, 맹원의 추가 모집과 각 면 지부 및 반조직 건설, 재정 문제와 맹원 정리에 관한 건을 처리하는 등 의욕적으로 활동하였다.
[현황]
창립 당시 회원은 25명이었다. 잡지 소년 조선의 거창 지사를 운영하고, 소녀부를 따로 두었다. 소년 조선 지사의 대표는 권진홍, 총무는 서용수, 배상운, 기자는 이영희, 김경애(金敬愛) 등이었다. 소녀부에는 김경애, 김양순(金良順), 김흥순(金興順), 김만달(金晩達), 이경희(李敬姬) 등이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의의와 평가]
소년회는 차세대 주체를 양성한다는 점에서 사회 운동 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거창 지역 독립운동가들 중 학생 운동 등 청년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은 거창 소년회를 비롯한 소년 운동의 영향도 컸을 것이라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