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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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居昌 靑年 會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중앙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병욱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0년 - 거창 청년회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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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시기/일시 | 1926년 8월 21일 - 거창 청년 회관 신축 낙성 축하식 거행 |
최초 설립지 | 거창 청년 회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중앙리 |
성격 | 건물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중앙리에 설립된 거창 청년회의 회관.
[개설]
거창 청년 회관은 1926년에 건축되어 일제 강점기 거창 지역 사회 운동에 구심점 역할을 했다.
[설립 목적]
거창 청년회의 설립 목표인 “정신적·물질적 신생활 자각”을 실현하기 위한 장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1920년 설립된 거창 청년회는 기존의 아림 청년회를 계승한 것이다. 1925년 8월 집행 위원회를 청년 회관에서 개최하고, 『동아일보』 창간 5주년 기념행사에 장소를 제공한 것으로 보아, 활동 초기에도 회합을 위한 일정한 장소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수백 명 회원이 회관 일간(一間)을 건축치 못함을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였고, 1922년 7월 9일 임시 총회에서 회관을 가을에 신축하기로 결의하는 등 ‘회관’이라 할 만한 독립적 공간을 갖추는 것이 거창 청년회의 오랜 과제였다. 그 결과, 거창 청년 회관은 1926년 5월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7월 말에 준공되었고, 8월 21일 오전 11시에 신축 낙성 축하식을 거행하였다. 그 위치는 현재의 거창읍 중앙리[하동]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6년 8월 21일 열린 낙성 축하식에는 200여 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으며, 축전 낭독과 위원의 건축 보고, 축사 등이 있은 후 청년회 만세 삼창을 끝으로 오후 2시에 폐회하였다. 이이서 서화 전람회, 주산 경기 대회, 씨름 대회, 웅변 대회 등이 이어졌으며, 22일과 23일에는 활동 사진 영사회가 열려 관람자가 매일 밤 600~700명 이상이 되는 등 대성황을 이루었다. 또 22일부터 25일까지 4일간 ‘남선(南鮮) 정구 및 축구 대회’가 개최되었고, 각 부문별 시상식을 가졌다.
그러나 축하 운동회에 참가하였던 김천 청년단이 거창 청년회의 정책에 대해 탄핵 강연을 벌이면서 총무 부원이 일시에 사임장을 제출하는 등 갈등이 표출되었다. 이후 침체기가 지속되어 회관 건립 2년 후인 1928년 8월 현재 “청년회 간판만 붙이고 있을 뿐”이라는 비판도 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창 소년 음악회[1927년 2월], 거창 노동조합 역원회[1927년 4월] 등의 행사가 개최되었고, 시장 문제 시민대회[1927년 4월], 신간회 거창 지회 창립 대회[1927년 10월], 가하단 신춘 강연[1928년 3월], 척사 대회[1929년 2월] 등의 행사가 꾸준히 개최되었다. 특히 거창 청년 회관에서 개최된 보성 학원은 일제 강점기 말까지 지속되어 “양성한 남녀 아동이 실로 천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현황]
1926년 건립된 거창 청년 회관의 부지는 109㎡[약 33평]으로, 청부금은 1,560원이며 공사를 맡은 이는 목공 윤지권(尹之權)이었다. 이 공사 대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원 주남재(朱南宰) 이하 “전 총무 부원의 열렬한 성원으로 수백 원의 금원(金員)을 수집”하여 “맨손과 맨주먹으로[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2,800원”을 모았다고 한다. 부지 외 건물이나 부대시설에 대한 상세한 현황은 전하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거창 청년 회관에서는 거창 청년회의 행사는 물론, 신간회 등 타 사회 단체의 행사도 활발히 개최되었고, 음악회 등 문화 행사와 함께 아동의 교육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이처럼 거창 청년 회관은 단순히 청년회의 회합 장소에 그친 것이 아니라, 거창 지역 사회 운동의 구심점이자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