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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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居昌 衡平社 |
영어공식명칭 | Geochang Branch Office of Joseon Social Equality Society |
이칭/별칭 | 조선 형평사 거창 분사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병욱 |
설립 시기/일시 | 1923년 - 조선 형평사 거창 분사 걸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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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26년 6월 15일 - 조선 형평사 거창 분사'에서 '거창 형평사'로 개칭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6년 6월 15일 - 거창 형평사 창립 축하식 거행 |
최초 설립지 | 조선 형평사 거창 분사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
성격 | 사회단체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에 설립되었던 조선 형평사 소속 지부.
[개설]
거창 형평사는 1923년 조선 형평사 본사와 함께 설립되어, 1926년 6월 창립 축하식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설립 목적]
조선 형평사는 1923년 4월 진주에서 백정의 신분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결성된 사회 운동 단체이다. 그 설립 취지문에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우리도 참다운 인간으로 되고자 함”이라며 구체적 목표[主旨]를 밝혔다. 거창 형평사 역시 이러한 조선 형평사 본사의 취지에 동감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본사 산하의 지역 단체로서 설립되었다.
[변천]
거창 형평사는 1926년에 이미 3주년이 되었다는 보도를 볼 때, 1923년 즈음 본사와 함께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명칭은 ‘조선 형평사 거창 분사’였다. 그러나 이후 활동은 미미했던 것 같으며, 간부 김상석(金尙石), 이덕재(李德在) 등의 열의로 명맥을 이어 나갔다. 1926년 5월 2일 뒤늦게 창립 축하식을 개최하여 활동의 전기를 마련하려 하였으나, 순종의 사망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연기하여, 6월 15일 개최하였다. 이날 창립 축하식에서 ‘형평사 거창 분사’를 ‘거창 형평사’로 개칭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6년 6월 15일 오후 4시 거창 종로 신태성(愼台晟)의 신축 2층 누상에서 개최된 창립 축하식은 다수 경관의 경계 속에 유형(兪衡)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정기표(鄭基杓)의 식사, 홍보용(洪甫容)의 취지 설명, 축전 축문 낭독과 축사, 사원 이도서(李道瑞)의 소감 발표에 이어 만세 삼창으로 폐식하였다. 그 후 다과회가 이어졌으며, 김천 여자 청년회와 영동 소녀회의 ‘소인극[아마추어 연극]’이 공연되었다.
[현황]
거창 형평사의 산하 단체로는 1926년 6월 18일 설립된 거창 형평 청년회와 함께 위천 지사가 확인된다. 거창 형평사 위천 지사 창립 축하식은 거창 형평사 창립 이튿날인 6월 16일 오후 3시 위천 시장 전석도(全錫道)의 집에서 개최되었으며, 식순과 공연의 내용은 동일했다.
한편 거창 형평사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1930년 9월 거창군 가북면 중촌에서 백정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백정 유태식이 자신의 콩밭에서 꼴을 베다가 곡식을 상하게 한 한만이의 아들을 꾸짖자, 한만이가 “백정이 양반의 자식을 때리며 욕설을 한다.”며 유태식을 곤봉으로 난타하여 사망케 한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거창의 사회 운동은 전반적으로 침체된 상태였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당시 가장 소외받았던 계층인 백정의 인권 신장을 위한 형평 운동 단체가 거창읍과 위천면 2개 지역에 설립되어 활동하였음을 볼 때, 거창군의 사회 운동 역량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