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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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居昌 靑年 同盟 |
영어공식명칭 | Geochang Youth Alliance |
이칭/별칭 | 거창청맹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 지역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개설]
1924년 결성된 조선 청년 총동맹은 1927년 6월 집회 위원회에서 방향 전환하여 무산 청년 운동을 전 민족 청년 운동으로 전선을 확대하기로 결의하였다. 신운동 방침으로 종전의 청년 단체를 해체하고 전 청년을 포괄하는 군·부 청년 동맹을 조직하기로 하여 군·부 동맹 및 도 연맹의 강령과 규약을 통일하였다. 군·부 청년 동맹의 기초 조직으로 반과 지부를 두기로 하였다. 이러한 청년 운동의 흐름 속에 거창 지역에서도 이러한 방침에 따라 청년 단체들이 해체하고 거창 청년 동맹이 결성되었다. 거창 청년 동맹은 사회주의 색채가 강하였고,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웅양, 거창, 가조 등 지부 결성에 노력하였다.
[설립 목적]
경상남도 거창 지역 무산 청년을 중심으로 전체 청년 운동의 연합과 협동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1928년경 거창 청년 동맹이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거창 청년 동맹은 지부 결성에 노력하였다. 1930년 3월 25일 거창 청년 동맹 웅양 지부 설립 위원회를 열고, 3월 30일 설립 총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준비 위원은 이완화(李完和), 이진화(李晋和), 이상도(李相道), 이증화(李增和), 이재근(李在根)이었다. 3월 30일 웅양 지부 설립 총회가 개최되어 집행 위원장 이익화(李益和), 집행 위원 이진화·이완화·이상도·정민상(鄭民相)·이증화·성백행(成百行)·이현집(李鉉集)·이태영(李台永), 대회 대의원으로 성백행·이익화·이완화·정민상·이증화가 선출되었다. 1930년 4월 5일 거창 건계정(建溪停)에서 거창 지부 창립 총회가 개최되었다. 지부장 신창선(愼昶銑), 위원 이건용(李建容)·박금득(朴今得)·문용규(文龍圭)·신병환(愼秉桓)·김두진(金斗珍)·신쾌봉(愼快鳳)·신중달(愼重達)·권진홍(權鎭弘)·신중길(愼重吉), 대의원 장대희(章大熈)·신종(愼鍾)·이광우(李光雨)·이건용(李建容)·김공섭(金共燮)·한정권(韓廷權)·정한원(鄭漢源)·황창석(黃昌錫)·서재년(徐在年)·문O규(文O圭) 외 수 명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위천 지부도 설립되었고, 가조 지부도 설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청년 총동맹은 1931년 5월 이후 해산의 수순을 거쳤으나 거창 청년 동맹의 경우 1932년 5월 메이데이 행사 관련으로 활동을 한 것이 확인되어 그 이후 해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거창 청년 동맹에서는 강연을 통해 청년 교양에 힘썼고 노동 농민 운동과 소년 운동 지원, 메이데이 행사 등의 사업을 진행하였다. 거창 청년 동맹 내 여자반 결성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지역 교육에도 열성을 보여 보성 학원의 지원을 위해 음악회도 개최하는 등 사회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1930년 5월 3일 거창 청년 동맹 거창 지부에서 춘계 음악회를 개최한 기록이 남아 있다.
[현황]
1930년 5월 7일 제2회 정기 대회 당시 임원진을 보면 집행 위원장 신창선, 집행 위원 신용섭(愼鏞燮)·이광우(李光雨)·신우철(愼宇哲)·문용규(文龍奎)·정한원(鄭漢源)·김두진·장대희·이근래(李根來)·이건용·전대선(全台善)·신희종(愼熈宗)·유문수(劉文壽), 집행 위원 후보 권진홍(權鎭弘)·이오판(李五判), 검사 위원 장병희(章柄熈)·황창석(黃昌錫), 검사 위원 후보 김공섭이다. 1931년 5월 9일 3차 정기 대회에서 집행 위원장, 집행 위원, 집행 위원 후보, 검사 위원장, 검사 위원을 선출하였다. 집행 위원장은 신성재(愼省縡), 검사 위원장은 장대희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청년 총동맹 경남 연맹 거창 청년 동맹은 청년 운동의 활발한 활동을 위해 지부 조직에 힘썼으며 일제의 탄압을 받았지만 지역 운동에 앞장서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