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1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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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居昌 人民 委員會 |
영어공식명칭 | Geochang Council of People´s Commissar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1945년 경상남도 거창 지역에 설립된 조선 인민 공화국 경상남도 인민 위원회 소속 민간 자치 기구.
[개설]
거창 인민 위원회는 1945년 10월 이후에 결성되어 거창 지역의 행정권을 장악하고 주민 자치 기관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설립 목적]
거창 인민 위원회는 1945년 9월 6일 서울에서 선포된 조선 인민 공화국의 거창 지역 지부로 결성되었다. 거창 인민 위원회는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 건설’, ‘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 세력 일소’, ‘대중 생활의 급진적 향상’, ‘세계 평화의 확보’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조선 인민 공화국의 정강을 지지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45년 10월 5일 경상남도 인민 위원회 결성 이후 건국 준비 위원회 경상남도 지부가 경상남도 인민 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건국 준비 위원회 거창 지부도 거창 인민 위원회로 개편되었고 각 면마다 인민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경상남도 20개 군에서 결성된 인민 위원회는 행정기관 접수, 치안 유지 활동, 세금 징수, 인구 조사 등과 같이 사실상의 정부와도 같은 광범한 통제력을 가졌다. 거창 인민 위원회도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행정권을 장악하고 사실상의 주민 자치 기관으로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거창 인민 위원회는 부산, 마산 등 경상남도의 주요 지역 인민 위원회가 결성되는 10월 중순부터 11월 20일 사이에 결성되었다. 거창 인민 위원회 위원장은 신학업(申學業)이었다. 1945년 11월 20~23일 서울 천도교 강당에서 개최된 전국 인민 대표자 대회에 거창 대표로 참여한 인물은 신학우(申學雨)와 함일호(咸一鎬)였다. 1946년 2월 7일 민주주의 민족 전선 경남도 위원회 결성 준비 위원회에 거창 인민 위원회를 대표하여 우한욱(禹漢旭)이 준비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47년 거창 인민 위원회 대표는 신학우였다.
거창 인민 위원회는 미군정이 임명한 장자관(張子寬) 거창 서장과 신중목(愼重穆) 거창 군수와는 별도로 거창 경찰서장과 경찰을 임명하였다. 거창 군민들은 일제 강점기 거창 청년 운동과 신간회 설립을 주도한 기독교 민족주의자 주남재(朱南宰)를 거창 군수로, 신간회 임원을 지낸 지역 유지 황창석(黃昌錫)을 거창 경찰서장으로 뽑아 행정과 치안 유지 임무를 맡겼다.
미군정은 1946년 4월 14일 주남재 거창 군수와 황창석 거창 경찰서장을 파면시키고, 친일 관료 경력을 가진 정순종(鄭順鐘)을 거창 군수로, 일제 고등계 경관 정정옥(鄭正玉)을 거창 경찰서장으로 임명하였다. 1946년 4월 15일에는 거창 인민 위원회 사무실을 수색하고 문서 일체를 압수하였다. 거창 인민 위원회가 임명했던 경찰도 미군정 군대가 출동하여 체포하였다. 1946년 6월 4일 거창 인민위원장 신학업 등 39명이 미군정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거창 인민 위원회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거창 인민 위원회는 해방 후 거창을 대표하는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체 세력으로 부상하였고 거창 군민의 지지를 받았다. 일제의 통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미군정의 정책에 따라 거창 군민의 지지를 받던 인민 위원회는 배제되고 일제의 통치에 동조하던 유지 인사들이 재등장하였다. 이러한 탄압은 군민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이후 자율적으로 형성되어 가던 거창 지역의 정치 구조가 강제적으로 재편됨으로써 좌우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는 빌미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