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1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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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居昌邑 靑年 同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194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에서 결성된 조선 청년 총동맹 소속 청년 단체.
[개설]
거창읍 청년 동맹은 1945년 12월에 결성된 전 조선 청년 총동맹의 거창읍 지부로 결성되어 미군정의 탄압을 받으며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설립 목적]
거창읍 청년 동맹은 거창 지역 청년과 청년 조직들을 총망라하여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과 봉건적 요소 및 반동 세력의 철저한 숙청, 청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지위 향상을 꾀하는 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1946년 4월 이후 거창군 인민 위원회, 거창 농민 조합 등과 함께 미군정의 탄압을 받아 조직과 활동이 약화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46년 2월 10일 거창읍 청년 동맹 제1회 총회가 열렸다. 회원 750명, 내빈 50여 명이 참석하였다. 위원장에 신양재(愼陽縡), 부위원장 이영구(李永九), 연락 부장 우한운(禹漢雲), 조직 부장 정삼창(鄭三彰), 선전 부장 김종호(金鐘虎), 체육 부장 김학(金學)이 선출되었다. 거창읍 청년 동맹 신양재는 1933년 7월 거창 농민 조합 사건으로 체포되어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를 적용받아 징역 1년 3개월 형을 언도받은 인물이었다.
거창 청년 동맹원 김형찬 외 3인은 ‘적기가’를 부르는 등 사회주의 성향의 활동 모습을 보였다. 미군정이 임명한 정정옥 거창 경찰서장은 청년 동맹원들을 검거하여 유치하는 등 탄압하였다. 1946년 4월 15일 미군정 경찰이 청년 동맹 사무실에 대한 수색을 단행하여 청년 동맹 활동 문서 전체를 압수하였다. 1946년 6월 4일 거창 인민위원장 신학업(申學業)과 39명의 거창 지역 활동가들이 체포될 때 거창읍 청년 동맹도 조직에 타격을 받아 활동이 약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해방 후 거창 군민과 청년들의 민족의식과 독립 의식을 고양시키고 신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거창읍 청년 동맹은 거창군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거창 인민 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거창 좌익 세력의 대중적, 조직적 지지 기반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