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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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居昌 慎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익현 |
본관 | 거창(居昌) - 경상남도 거창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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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거창 신씨 거창 입향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가지리 개화 마을 |
세거|집성지 | 거창 신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
세거|집성지 | 거창 신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대동리 |
세거|집성지 | 거창 신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
세거|집성지 | 거창 신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 |
세거|집성지 | 거창 신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양지리 |
세거|집성지 | 거창 신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
묘소|세장지 | 거창 신씨 거창 세장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동변리 구산 마을 |
성씨 시조 | 신수(慎修) |
입향 시조 | 신성(慎成) |
[정의]
신수를 시조로 하고 신성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거창군의 세거 성씨.
[개설]
거창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거창 신씨(居昌慎氏)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대과 급제자 34명, 관찰사 8명, 판서 16명, 영의정 3명, 왕비 2명을 배출한 명문(名門)이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 세력인 12세 신이충(愼以衷)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세종 대에 형조 판서의 자리에 오른다. 신이충의 손자 신승선(慎承善)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세조 때 익대 삼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거창군(居昌君)에 봉해졌으며, 『성종실록』을 편찬했다. 신승선의 아들 신수근(慎守勤)은 연산군 때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중종반정으로 임금이 된 중종이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책봉했으나 박원종 등에 의하여 폐출되었다. 1739년(영조 15) 단경 왕후(端敬王后)로 복위되었다.
[연원]
거창 신씨의 시조는 고려 문종 때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한 공헌공(恭獻公) 신수(慎修)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8세(世) 신성(慎成)이 1260년 개경에서 남하하여 거창에 터를 잡았다. 이후 15세까지 7대에 걸쳐 200여 년 이상 살아 오면서 거창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거창 신씨는 참판공파(參判公派-伯派), 서령공파(署令公派-仲派), 양간공파(襄簡公派-季派)로 나뉘어 각각 종친회를 두고 있다.
[입향 경위]
7세 신집평(慎執平)이 1258년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재임 중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죽도(竹島)로 들어가 저항하였으나 반역자 조휘와 탁청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 신집평의 아들 신성은 고려 조정이 친원파의 세상이 되자 1260년 개경에서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가지리 개화 마을로 이주하여 터를 잡았다.
[현황]
1934년 조사된 조선 총독부의 자료에 의하면 거창 신씨는 거창읍 동동(東洞)에 73가구, 월천면 양평리에 20가구, 웅양면 노현리에 70가구, 위천면 대정리에 97가구, 신원면 양지리에 30가구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2003년 통계에 따르면 거창에는 942가구 2,413명의 거창 신씨가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관련 유적]
거창 지역의 거창 신씨와 관련된 유적은 거창읍 동변리 구산 마을에 시조로부터 14세조까지의 묘소와 제단이 조성된 구산재(龜山齋)가 있고, 위천면 수승대 일원의 구연 서원과 요수정, 황산리 신씨 고가, 신원면 양지리 인풍정 등이 있다. 거창읍 창충사는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