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6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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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居昌 鄕案 |
영어공식명칭 | Geochang Hyang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어윤동 |
[정의]
조선 시대 경상남도 거창 지역 사족(士族)들의 명부.
[개설]
유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 시대에는 지방 자치 기구인 유향소(留鄕所)가 있어 수령을 보좌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향리(鄕吏)[아전]를 감찰하며 민의를 대변하였다. 유향소에 관여하는 선비들의 명단이 향안(鄕案)이다. 거창 향안에 처음으로 등재된 인물은 신맹종(慎孟終)이다. 신맹종의 생몰 연대는 미상이나 족보의 방주(傍註)[본문 옆이나 본문의 한 단락 뒤에 써넣는 주석]에 "세조 원년(1455) 경태(景泰) 을해(乙亥)에 호군(護軍)으로 원종공신[정공신(正功臣) 이외의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공신 칭호]에 참여했다."라고 했으니, 거창 향교가 설립된 1415년과 거의 동시에 유향소가 설치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31회에 걸쳐 총 1,783명이 등재되었는데, 1739년에는 51명이 기재되는 데 그쳤다.
[형태 및 구성]
1906년에 유향소가 폐지되면서 향안 등의 서책은 향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향안이 모두 4종이 있는데 규격이 저마다 다르다. 종횡(縱橫)이 각각 52㎝×36㎝, 56㎝×39㎝, 50.5㎝×32㎝의 대형책은 철판을 붙여 단단히 편철했는데 부식이 많이 된 것이 있고, 39㎝×29㎝로 된 것은 사색당파 시에 당파에 따라 3권이었던 것 중의 하나로 보인다.
[특징]
현존 향안이 있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다 남은 것을 근거로 1599년에 모곡 정사(茅谷精舍)에서 다시 작성하였다고 1633년에 이준함(李俊馠)의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 1677년 정유년(鄭維秊)의 서문에는 1650년을 전후하여 향중에서 벌을 받은 김모(金某)가 향안을 몰래 꺼내어 향원(鄕員)의 성명을 기탄없이 칼로 오려내어 훼손된 것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1744년 거창 수령이었던 이장오(李章吾)의 서문에는 사색당파가 치열할 때는 당파에 따라 향안을 작성해 향안이 3종류가 되어 저마다 명목을 내세워 싸웠는데 , 영조가 1729년에 기유 처분(己酉處分)을 내리며 당파별로 고르게 등용해 초기 탕평책(蕩平策)의 기초를 마련하면서 1744년에는 1권으로 되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향안에 등재되려면 본인의 학문과 덕행도 선비로서 모범이 되어야 하지만, 부계(父系)·모계(母系)·처계(妻系)에서 도덕적인 하자가 있어도 등재될 수 없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다. 유교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선택된 선비들이라 할 수 있으며, 향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요직인 도유사(都有司)[향교, 서원, 종중, 계중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우두머리]와 장의(掌議) 등도 유향소의 사족들이 주로 맡았으며, 혼맥과 사우(師友) 관계도 주로 향안에 등재된 사족끼리 인연을 맺었다.
거창 향안에 등재된 1,783명의 선비들은 당시에 수준급 선비였다 평가할 수 있고, 따라서 후손들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계급 사회에서처럼 양반 자랑은 절대로 금물이며, 훌륭한 선비 정신만은 계승하여 발전시킬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