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656
한자 居昌月軒古家
영어공식명칭 Wolheon Old Hous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월곡길 77[무릉리 262]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호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일제 강점기 - 거창 월헌고가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33년 - 거창 월헌고가 증개축
문화재 지정 일시 2014년 4월 17일연표보기 - 거창 월헌고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3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거창 월헌고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현 소재지 거창 월헌고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262 지도보기
원소재지 거창 월헌고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262
성격 고택
소유자 최석기
관리자 최석기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때 지주 계층이 지은 근대 한옥.

[개설]

월헌 고가는 일제 강점기에 지은 거창 지역 지주 계층의 가옥으로, 거창 무릉리 최진사 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7호]에서 분가해 나온 4형제의 집 가운데 하나이다. 규모가 작고 공간 구성이 소박한 월헌 고가는 종가에서 분가한 자손들의 초기 주거 모습과 생활상을 잘 보여 준다.

[위치]

월헌 고가는 화순 최씨 집성촌인 월곡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4형제 중 둘째 아들이 결혼하여 분가할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월헌 고가거창 무릉리 최진사 고가 앞쪽에서 남동향하고 있다. 월곡 마을 가옥의 주향은 남향 또는 남동향으로, 특히 마을 중심부의 가옥들은 대부분 남동향이다.

[변천]

월헌 고가는 마을 중심부에 있는 거창 무릉리 최진사 고가와 인접해 자리 잡고 있다. 소유자 최석기의 증조할아버지가 분가할 때 지은 것을 1933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안채 대청 상부의 종도리 받침 장여 밑면에 “공자탄생 2484년 계유 팔월 상육일 감오(孔子誕生二千四百八十四年癸酉八月上六日甲午)”라고 붓으로 써 놓은 기옥이 있어, 1933년에 안채와 사랑 등을 개축했음을 알 수 있다. 1933년에 이루어진 개축 공사는 소유자의 할아버지가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형태]

월헌 고가는 좁고 긴 대지에 ㄷ자형 안채, ㄱ자형 사랑채 및 사랑채 서편에 붙여 지은 중문채, 일(一)자형의 대문채, 광채 등 모두 5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대지의 맨 앞쪽에서부터 대문채, 사랑채, 안채를 주축선에 맞추어 남동향으로 짓고, 사랑채 왼편에 중문채, 안채 서편에 광채를 각각 배치했다. 따라서 대문채, 사랑채, 안채는 남동향하고 있으나 안채를 기준으로 사랑채, 대문채는 조금씩 동쪽으로 비껴 자리 잡고 있다.

안채 평면은 거창 지역에서 보기 드문 ㄷ자형이다. ㄷ자형의 안채는 흔치 않은 사례이나 거창군 남하면의 인근에 남아 있는 무릉리 정씨 고가윤경남 장군 생가도 ㄷ자형이어서 이 같은 계통이 거창 지역에 근대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안채를 ㄷ자형으로 건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지 폭이 좁아 원하는 주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ㄷ자형의 평면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정면 우측 익사 끝에 부엌을 두고 그 뒤에 1칸 마루방을 연접시켜 배설하고, 우측으로 대청쪽으로 돌출시켜 1칸 크기의 큰방을 꾸몄다. 대청 맞은편에 1칸 크기의 웃방을 두고, 거기에 붙여 작은방을 만들었다. 부엌 상부에는 다락이 있었으며, 안마당에 면한 방과 대청 등의 앞에는 폭이 좁은 쪽마루가 놓여 있다.

안채 상부 가구는 사랑채와 같은 간략한 삼량가이며, 크게 휜 대들보 위에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한 구조이다. 지붕은 합각지붕과 맞배지붕이 혼용되었는데, 안마당에 면한 ㄷ자형 지붕의 돌출부는 풍판을 시설한 박공지붕으로 처리하고, 용마루 양 끝은 합각지붕으로 만들었다. 지붕의 내림마루 끝에는 ‘海(해)’ 자를 새긴 망새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안마당 쪽 처마 끝에는 각재와 평함석을 사용하여 ㄷ자형의 차양을 가설해 놓았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인근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남부 지방의 전형은 아니다. 집의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ㅡ)자형 전후툇집에서 정면 우측 앞쪽으로 사랑마루 1칸을 돌출시킨 형태이다. 사랑채의 전심부는 전후툇집이라고 하나 실은 후퇴의 주간이 넓어 마치 겹집처럼 구성된 특징을 보인다. 평면 구성은 중심부에 전(田) 자형으로 구획된 온돌방을 두고 그 우측 전면에 누마루형 사랑마루가 돌출된 형태이다. 특히 전(田) 자형 평면의 뒷방은 후퇴가 확장되면서 마치 두 줄로 실을 배치한 것처럼 되어 있다. 사랑방의 좌측 끝은 바닥을 우물마루로 처리한 마루방이고, 이 마루방 뒤는 제기고이다. 그 앞쪽에 폭이 좁은 누마루를 꾸미고, 주위에 숫대살 문양의 세 살을 짜 넣은 평난간을 둘렀다. 사랑 대청의 주위에도 계자각 난간을 시설하여 장식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채는 납도리 장여 수장집으로 장여와 보아지가 십자로 결구되어 대들보 밑면을 파고 들어가 결구되어 있다. 사랑 대청 정면 기둥 상부와 주간에는 양 끝을 초각하고 표면을 선각(線刻)한 과시적인 삼소로 화반이 사용했다. 이러한 장식적인 화반은 지붕 하중의 지지는 물론 사랑채에 장식성을 더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누마루의 측면 주간에는 꽃무늬에 태극무늬와 ‘인(忍)’ 자 무늬를 더한 작은 원형 화반 2개가 사용되었다. 사랑채의 지붕은 홑처마 합각지붕이고, 상부 가구는 삼량가로 퇴보와 연결한 대들보 위에 폭이 좁은 사다리꼴의 긴 각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했다.

사랑채 서편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중문간채를 짓고, 좌우에 짧은 담을 쌓아 공간적으로 구분했다. 이 중문간채는 가운데 중문간을 내고 좌우에 벼 알곡을 보관하던 나락뒤주와 여자들이 사용하는 측간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측간은 하부에 돼지를 기르는 통시형 뒷간의 구조였다고 한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평면은 정면 우측부터 머슴방, 대문간, 헛간, 외양간, 외측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창호는 머름 없이 하방이나 통머름 위에 문선을 세우고 상인방이 문인방을 겸하는 형태이다. 안채의 주간(柱間)은 다양하며, 특히 우측면과 배면에는 80㎝ 정도의 퇴를 달아 내부 공간을 확장하거나 벽장, 반침 등을 시설하여 수장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황]

월헌 고가는 비교적 좁은 대지에 안채, 사랑채, 대문채, 중문채, 광채 등 모두 5동의 건물이 집약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근대 한옥이다. 1933년에 신축에 가깝게 개축했으며, 사랑채는 한국 전쟁 직후 지금의 모습으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1933년에 개축한 뒤로 근년에 이르러 안채의 부엌이나 기단 및 대문채, 중문채 등을 생활에 적합하게 수리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원형이 훼손되었으며, 이 밖에 건물이 노후와 관리 소홀로 인해 나날이 훼손 정도가 심각해지고 있다. 대문채 서편에 붙어 있던 외측(外厠)과 마굿간이 철거되었으며, 사랑마당 서편 담 밑에 있던 3칸의 목욕간[욕간+통로+헛간]은 철거되어 현재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안채 서편의 광채는 개조되어 원형을 많이 상실했다. 2014년 4월 17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1933년에 개축한 근대 한옥으로, 사랑채는 한국 전쟁 직후 지금의 모습으로 고쳐 지은 것이다. 월헌 고가처럼 살림집을 ㄷ자형 안채와 ㄱ지형 사랑채로 건축한 것은 거창 지방에서 흔치 않은 사례이다. 이러한 형태는 협소한 대지 조건을 고려한 결과이며, 평면을 ㄷ자[안채]와 ㄱ자형[사랑채]으로 구성한 것은 근대 이후 주생활과 가사노동의 합리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안채 부엌 위쪽에 마루방을 시설하고 거기에 붙여 큰방을 둔 것, 웃방을 도장방처럼 사용하고 그 아래에 작은방을 꾸며 놓은 것, 정면의 ㄷ자형 쪽마루와 대청을 동선의 공간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사랑채의 사랑방 주위의 전(田) 자형 공간 구성, 누마루와 사당 대청 주위의 난간과 화반에 보이는 장식적 표현은 근대기 농촌의 지주 계층이 추구했던 주택 건축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월헌 고가는 여러 면에서 근대 한옥의 건축 특징을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학술과 문화재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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