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709 |
---|---|
한자 | 褒忠祠碑 |
영어공식명칭 | Stone Monument of Pochoongsa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원촌3길 25-2[노현리 18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익현 |
건립 시기/일시 | 1807년 - 거창 포충사 경내에 포충사비 건립 |
---|---|
현 소재지 | 거창 포충사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187 |
성격 | 유적|묘정비 |
관련 인물 | 정희량(鄭希亮)|이우방(李遇芳) |
재질 | 화강암[비좌와 이수]|오석(烏石)[비신]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64㎝[높이]|65㎝[너비]|24㎝[두께]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포충사 경내에 있는 조선 시대의 비.
[개설]
이술원(李述原)[1677~1728]은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무신난(戊申亂)] 때 현감 신정모가 도주하자 향임을 맡아 정희량(鄭希亮)의 반군과 맞서다가 순절하였다. 포충사비는 1807년(순조 7) 충강공(忠剛公) 이술원을 제향한 포충사(褒忠祠) 경내에 건립되었다. 포충사비는 충신 이술원을 기리는 한편, 포충사 건립 내력을 상세히 기록한 비다.
[위치]
주소지는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원촌3길 25-2[노현리 187]이다. 경상남도 거창에서 김천 방면으로 가다가 웅양면 소재지에서 웅양 중학교로 가는 길의 왼쪽에 있는 거창 포충사 경내에 있다.
[형태]
포충사비는 비좌이수(碑座螭首)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장방형의 화강암 기단석에는 칠성혈(七星穴)이 새겨진 곳이 두 군데 있다. 비신은 오석(烏石)이고, 이수 앞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음각되어 있다. 뒷면에는 꽃무늬를, 측면에는 용의 꼬리만을 음각했다. 비신의 앞면과 뒷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금석문]
비신의 상단부에 ‘충신 증대사헌 이공 묘정비(忠臣贈大司憲李公廟庭碑)’라 전서로 새기고, 비문은 비신 앞뒤면에 해서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송환기(宋煥箕)[1728~1807]가 짓고 글씨는 해서로 송치규(宋穉圭)[1759~1838]가 썼으며, 전액은 이조원(李肇源 )[1758~1832]이 썼다. 송환기는 송시열의 5대손, 송치규는 6대손이다. 비를 세울 당시 거창 부사는 송시열의 7대손 송흠서(宋欽書)였다. 전액(篆額)을 쓴 이조원은 본관이 이술원과 같은 연안(延安)으로 정조부터 순조 때에 활약한 문신이다.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현황]
포충사비 곁에는 충신, 효자의 정려가 있다. 이인좌의 난 때 현감은 도주하고 향임을 맡아 정희량 반란군을 제지하다가 순절한 이술원의 충신 정려와 아들 이우방(李遇芳)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우영장 휘하에 종군하여 반군 토벌에 앞장섰던 효행을 표창한 효자 정려다. 거창 포충사[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57호]는 1768년(영조 44)에 사액 서원(賜額書院)이 되었고,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존속한 서원이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