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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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加祚己未獨立萬世記念塔 |
영어공식명칭 | Monumental Tower for Honoring the March 1st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산90 가조기미독립현충시설 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석 |
건립 시기/일시 | 1981년 - 가조기미독립만세기념탑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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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가조기미독립만세기념탑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산90 가조기미독립현충시설 내 |
성격 | 기념탑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660㎝[높이]|91㎝[너비]|122㎝[두께] |
관리자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사무소|거창 3.1정신 계승 발전 위원회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에 있는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1983년에 세운 기념탑.
[개설]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에 있는 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탑은 1981년 3월 1일 가조·가북 3·1독립운동의거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건립한 기미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탑이다.
[건립 경위]
1919년 3월 22일 가조 지역에서 일어난 기미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79년 9월 가조·가북 3·1 독립 운동 의거 기념비 건립 추진 위원회[위원장 김재연]를 설립하여, 지역 주민들과 출향 인사들의 모금으로 건립하였다. 기념탑 비문은 출향 인사인 경북대학교 교수인 문학박사 김종택과 송석희가 글을 썼다.
[위치]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산90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가조기미독립만세기념탑은 높이 146㎝, 가로 375㎝, 세로 372㎝ 크기로 화강암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높이 115㎝, 가로 114㎝, 세로 152㎝의 기단을 다시 만들고, 그 위에 높이 660㎝, 가로 91㎝, 세로 122㎝ 크기로 화강암 탑을 세웠다. 기념비에는 당시 유공자들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향토 출신 김종택 박사가 비문을 짓고, 석대 송석희가 글씨를 썼다. 기념비는 가조·가북 3·1 독립 의거 기념비 건립 추진 위원회에서 세웠다. 다음은 금석문 내용이다.
[금석문]
외외 름름(巍巍凜凜) 가야(伽倻) 영봉(靈峯) 여기 머물러 한 웅부(雄府)를 열었으니, 가소(加召) 옛 땅이라. 들은 기름지고 물은 맑아 아름다운 산천은 인걸(人傑)을 기다려 비로소 빛을 더하니 순후(淳厚)한 인심에 기상 또한 스스로 높다. 마을마다 찬란한 사적(史蹟) 적지 아니하나 그 가운데서도 기미만세의거(己未萬歲義擧)로 온 고을이 떨쳐나서 죽음으로 독립(獨立)을 부르짖은 일은 길이 청사(靑史)에 빛날 자랑임이 분명하다. 창의(倡義) 있은 지 어언 60여 년, 상금(尙今)토록 기념탑(紀念碑) 일수(一竪) 이룩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던 중 오늘에야 가조(加祚) 가북(加北) 양 면민(兩面民)이 회동하여 피로 얼룩진 자리에 의거탑(義擧塔)을 세우게 되니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으나 후손으로서 어찌 감격이 없으랴. 가조 만세 의거(己未萬歲義擧)는 한민족이 자주(自主)·자존(自尊)·독립(獨立)을 쟁취(爭取)하기 위하여 분연(憤然)히 떨쳐 일어선 민족적 대의로 그중에서도 이 고을 의거가 오히려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경상 서부에서 선단(先端)을 획(劃)하였으니 이 또한 뜻이 가볍지 아니하다. 3·1 만세의 함성이 이 추백(陬僻)에까지 전해지자 평소 일제 침략(日帝侵略)에 통분하던 충의지사(忠義志士) 오문현(吳文鉉), 김호(金濩), 어명우(魚命佑), 최영순(崔榮淳), 김호(金浩), 김채환(金采煥), 신병희(慎秉禧), 어명철(魚命喆), 이병홍(李秉洪) 등이 가조(加祚)에서도 의거에 떨쳐나설 것을 결의하고 극비리에 동지를 규합하고 있던 차, 이를 안 열혈지사(熱血志士) 김병직(金秉直), 어명준(魚命俊) 등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3월 20일 장기리(場基里) 시장 날 정오를 기하여 독립 만세(獨立萬歲)를 외치고 용산(龍山) 일헌 분견소(日憲分遣所)를 습격하니 이날 뜻을 같이 한 창의(倡義) 군중이 4·5백에 달하였다. 이에 대한 일제(日帝)의 모진 탄압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거창(居昌) 장날인 3월 22일을 기하여 더욱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기로 기약하고 마을과 마을 문중(門中)과 문중마다 대표를 정하여 궐기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미리 탐지한 일헌들이 그 주동자들을 무참히도 체포하여 형언(形言)할 수 없는 모진 고문을 가하였다. 이 소문이 퍼지자 오히려 의기(義氣)로 자극된 가조(加祚) 가북(加北) 삼천 면민이 손에 손에 태극기(太極旗)와 몽둥이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大韓獨立萬歲)를 외치며 장기리 만학정(晩鶴亭) 뜰에 운집하니 그 도도한 기상은 창천(蒼天)을 뚫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들은 곧 피체중(被逮中)인 지사(志士)들을 구출하여 일로(一路) 거창읍(居昌邑)으로 항하였는데 시위 행렬이 사포현(沙浦峴)을 넘을 때 미리 포진하고 있던 일헌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히 돌진하는 의거 군중의 가슴에 무자비한 총격을 가하니 사포현(沙浦峴) 흰 벼랑은 온통 사상자의 유혈(流血)로 붉게 물들고 말았다. 참으로 저주받을 일제 침략자의 만행이었다. 이날 적의 흉탄에 신문구(慎文九), 배영환(裵永煥), 조이록(曺二祿), 이석종(李錫宗), 허경두(許瓊斗) 등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최상선(崔尙善), 최학서(崔鶴西), 이점준(李点俊), 문철주(文哲周), 곽병준(郭秉俊)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저들의 총칼 앞에 찢기고 쓰러지니 그날의 통한을 어찌 필설(筆舌)로 형언할 수 있으랴. 이어 주동 인물로 김병직(金秉直), 어명준(魚命俊), 김관묵(金寬黙), 어명철(魚命喆), 김익동(金翼東), 김호(金濩), 이병홍(李秉洪), 강두몽(姜杜蒙) 등이 피체되어 각각 3년 혹은 일년 형을 치루었고 오문현(吳文鉉), 최영순(崔榮淳), 어명우(魚命佑), 김채환(金采煥) 등은 피신하여 옥고(獄苦)를 면하였다.
오늘 저 무심한 산천은 말이 없어도 그날 죽음으로 쟁취한 우리의 독립은 더없이 값진 피의 대가(代價)임을 증언하고 있다. 여기 돌을 세워 선열(先烈)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하나니 호국(護國)의 영령(英靈)들이여 고이 잠드소서.
서기 1981년 3월 1일
문학박사 선산 김종택 근찬(文學博士 善山 金宗澤 謹撰)
석대 야성 송석희 근서(石帶 冶城 宋錫熙 謹書)
[현황]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사무소와 거창 3·1 정신 계승 발전 위원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해마다 3월 1일 거창군에서 3.1절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3월 22일을 전후한 주말에 경남 서부 보훈 지청과 거창군이 후원하고 거창 3·1 정신 계승 발전 위원회가 주관하는 가조·가북 기미 만세 운동을 재현하는 행사를 비롯한 3·1 민속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1919년 거창군 가조면에서 있었던 기미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60여 년이 지난 뒤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세운 기념탑으로 선조들의 애국 독립 정신을 기리고 지역 주민들에게 항일의 역사를 되새겨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