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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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宗煥 |
이칭/별칭 | 유종환(兪鍾煥),유종한(兪鍾漢)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가연 |
[정의]
개항기 거창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
[개설]
유종환(兪宗煥)[1860 또는 1858~1909]은 서울 출생의 무과 급제자로서, 1907년 김동신(金東臣)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김동신의 비장(裨將) 등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김동신이 체포된 후 80여 명의 부하를 이끌며 전성범(全聖範) 등과 연계하여 경상남도, 전라북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5월 초 경상남도 거창에서 무주 헌병 분견소의 일본 경찰과 교전하다 순국하였다.
[활동 사항]
유종환은 서울 출생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29세부터 32세까지 선전관(宣傳官)의 벼슬을 지냈으며, 1906년 고종의 명을 받아 의병에 투신하였다. 유종환은 진주로 거처를 옮기고 육남 소모장(六南召募將)으로서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1907년 9월 김동신 의병장이 경남 안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합군하여 선봉장이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9월 4일 거창군 북상면 월성에서 6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일본군 40여 명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후 유종환은 전북 무주, 충청도 황간, 영동 등지로 다니면서 의병을 모은 후 전북 무주군 안성(安城)에 주둔하다가 4월 중순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인 대덕산에서 함안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그 후 1908년 3월 6일에는 김동신 의병장과 함께 경상남북도 의병 800여 명을 이끌고 고제면 매학(梅鶴)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 유종환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문(通文)을 거창 지역에 돌려 일본의 침략을 격렬히 규탄하고 거창 지역 주민들이 의병 활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간절히 호소하기도 했다.
1908년 4월 27일, 무주군 무풍면 마곡에서 일본군 의병 토벌대와 격전을 치르던 중에 유종환은 머리와 오른쪽 어깨에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 부상으로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유종환은 이듬해인 1909년 1월 14일, 충북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에서 일본 경찰 정찰대를 물리쳤다. 1909년 3월 무렵에는 거창군 북상면 월성에서 문태서, 전성범, 박춘실 등의 의병장과 함께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그러나 1909년 4월 25일 거창에서 무주 헌병 분견소 소속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가슴에 총상을 입고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3년 유종환에게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