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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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邢凓·邢潔 兄弟 |
영어공식명칭 | hyeongryul-hyeonggyeol |
이칭/별칭 | 형률,형결,효자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태성 |
[정의]
조선 전기 거창 출신의 효자 형제.
[개설]
형률(邢溧)[?~?]·형결(邢潔)[?~?]은 거창 남상면 출신으로 조선 중종(中宗) 때 후릉 참봉을 지낸 형사명(邢士明)의 아들이다. 형은 아버지의 눈병을 고치기 위해 중국을 세 번이나 오가고 아우는 지극정성으로 약을 구하여 병을 고친 효자 형제이다.
[가계]
형률·형결의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아버지는 후릉 참봉(厚陵參奉)을 지낸 형사명(邢士明)이다. 진주 형씨 시조 형옹(邢顒)은 당(唐) 태종(太宗) 때 사람으로,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에 따라 8학사의 한 사람으로 평양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고려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중시조 형병(邢昞)의 13세손 형방(邢昉)이 고려 명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5세손 형공미(邢公美)가 충렬왕 때 왜구 정벌에 공을 세워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거창의 형씨 분파는 조선 세종~세조 때의 인물인 형박(邢搏)이 단종(端宗)이 왕위에서 물러날 때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송변리에 피신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
[활동 사항]
형율과 형결은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송변리 출신의 효자이다. 형율·형결 형제는 모두 아버지를 모시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아버지가 눈병이 들어 앞을 보지 못할 때 의원이 흰 양의 간이 좋다는 말을 하자 형율은 요동 총관에게 글을 올려 중국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물금첩(勿禁帖)을 얻어 중국을 세 번이나 오가며 제나라와 노나라에서 흰 양의 간을 구해 왔다. 그 사이에 아우인 형결은 한겨울에도 잉어를 구해 아버지에게 드려 차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 두 효자의 정성으로 아버지 형사명은 눈이 밝아져 여든 살이 되어도 벼룩과 이를 구분할 정도였다고 한다. 선조 임금이 두 효자의 효행에 감동하여 ‘효자 영릉 참봉 형률지려(孝子英陵參奉邢溧之閭)’라는 정려를 내렸다. 원래 정려는 남상면 송변리에 있었으나 1936년의 대홍수로 위태로워지자 지하동 어귀로 옮겼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