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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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愼性烈- 姜氏 夫人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심민정 |
출생 시기/일시 | 1759년 - 신성렬과 강씨 부인, 신성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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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800년 - 신성렬과 강씨 부인, 신성렬 사망 |
몰년 시기/일시 | 1803년 - 신성렬과 강씨 부인, 강씨 부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83년 - 신성렬 정려 하사 |
추모 시기/일시 | 1883년 - 강씨 부인 정려 하사 |
출생지 | 신성렬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 마을 |
거주|이주지 | 신성렬 거주지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 마을 |
묘소|단소 | 신성렬 묘소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 마을 뒤 호음동(虎音洞) |
사당|배향지 | 신성렬 정려각, 정려비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수승대 경내 거북 바위 맞은편 |
성격 | 효자|열녀 |
본관 | 거창 신씨|진양 강씨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거창 출신 효자와 그의 부인.
[개설]
조선 시대에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 마을에 살았던 신성렬(愼性烈)[1759~1800]은 친어머니 모친상 후 3년 동안 채식하였으며, 계모와 친부를 지극히 섬겼다. 부인 강씨(姜氏)는 남편이 천연두로 죽은 뒤 아이와 시부모 때문에 죽지 못하다가 3년 뒤 남편의 뒤를 따랐다.
[가계]
신성렬의 자는 백승(伯承)이다. 아버지는 양졸재(養拙齋) 신복명(愼復明)이고, 부인은 가의 동추(嘉義同樞) 증호참(贈戶參) 증좌승지(贈左承旨)를 지낸 진양 강씨(晉陽姜氏) 강헌(姜瀗)의 딸이다.
[활동 사항]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수승대 경내에 있는 정려각에 걸려 있는 정려문과 『고종실록』에 의하면, 신성렬은 6세에 어머니를 잃고 난 후 3년 동안 채식을 했고, 3년 동안 아이들과 놀지 않았으며 매번 기일이면 초상 때처럼 슬퍼하였다. 새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효성도 극진하여 자거나 식사할 때에는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이부자리를 펴는 등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지극히 모셨다. 장성한 뒤 이웃 마을에 돌기 시작한 천연두가 자신이 거주하는 곳까지 퍼졌으나 부모 곁을 떠날 수 없다며 끝까지 거부하다가 젊은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부인인 강씨 또한 시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으며, 남편에 대해서도 절의를 지켰다. 남편 신씨가 죽고 난 후 뒤를 따르려 했으나 남아 있는 시부모와 어린 아이 때문에 3년이 지난 뒤에야 남편을 따르면서 절의를 지켰다.
[묘소]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 마을 뒤 호음동(虎音洞)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883년(고종 29) 경상우도 암행어사 이헌영(李𨯶永)에 의하여 정려와 포상이 건의되어 10월에 정려되었다. 정려각에 두 사람에 대한 정려문과 비가 세워졌다. 거창 수승대 경내 거북 바위 맞은편 비각 안에 정려비가 있다. 영의정 김병국이 글을 짓고, 현감 홍영주(洪永周)가 글씨를 썼다. ‘효자 증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신성렬지려’, ‘열녀 증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신성렬 처 증숙인 진양 강씨지려’라고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