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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11·2 마창 노련 총파업 투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483
한자 -馬昌勞聯總罷業鬪爭
영어의미역 Strike Conflict of Masan and Changwon Labor Union on November 1th and 2th, 1989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89년 11월 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89년 11월 2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남도 창원시
관련인물/단체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종엽|이승필

[정의]

1989년 11월 1일과 2일에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산하 노동조합들이 벌인 총파업.

[역사적 배경]

1989년 노태우 정권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을 막기 위해 민주노동조합운동의 중심이었던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에 대해 집중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다.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지도부를 구속하였으며, 파업 투쟁이나 가두시위를 물리력으로 저지 하였다.

이런 가운데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는 감원·폐업 바람이 불었으며, (주)통일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간부들에 대한 폭행, 무더기 구속과 해고에 이어 노조 사무실에 공권력이 투입되기도 했다. 이러한 탄압은 당시 전국에서 가장 왕성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갖고 있던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발단]

1989년 9월 2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사무실에 괴한들이 난입하여 일하고 있던 실무자들을 폭행하고, 사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뒤이어 10월 28일에 (주)통일 노동조합에 공권력이 투입되었고, 10월 29일에는 무장 전경들이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사무실을 급습하여 이종엽 부의장을 비롯한 19명을 연행하였다. 이 사건은 계속적인 노동운동 탄압에 반발하고 있던 지역 노동자들을 극도로 분노케 하였고,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10월 30일 오후 비상운영위원회를 열어 총파업을 결의하였다.

[경과]

1989년 11월 1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산하 41개 노동조합 중 23개 노동조합이 임시총회를 마친 후 총파업투쟁에 들어갔다. 조합원들은 오후에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탄압 분쇄 및 공권력 개입 불법연행 저지를 위한 마산창원노동자 결의대회’에 참석하려고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으로 모였으나 집회장은 이미 경찰이 원천봉쇄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검찰청과 마산동부경찰서를 항의 방문 하기 위해 가두로 진출하였고, 경찰과 맞서 투쟁을 벌였다. 경찰은 오후 5시경 마무리 집회를 하고 해산하는 노동자들을 연행하였으며, 정리해고에 반발하여 두 달째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던 (주)통일 4공장을 기습하여 조합원과 그 가족까지 80여 명 전원을 연행하였다.

이에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11월 1일 밤 비상운영위원회를 열어 파업을 하루 더 연장하기로 했다. 11월 2일 파업에는 대림자동차, 대원강업, 세신실업 등 11개 노동조합이 파업에 참가했고, 나머지 노동조합들은 중식 집회와 준법 투쟁 등을 벌였다.

[결과]

총파업투쟁으로 이승필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조직국장을 비롯한 간부 3명이 석방되었지만, 나머지 수십여 명의 노동자들은 풀려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파업을 중단하고 전국투쟁 일정에 보조를 맞추기로 하였다.

[의의와 평가]

총파업투쟁은 1987년 12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 창립한 이래,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이름으로는 처음 벌인 파업투쟁이다. 이 투쟁을 계기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조직 사수 차원의 소극적 투쟁을 벗어나 노동악법 철폐와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 투쟁의 전국적 사안과 결합한 공세적 투쟁으로 전환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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