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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포 만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044
한자 乃而浦萬戶
이칭/별칭 제포 만호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제장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390년연표보기 - 내이포 만호진이 설진되어 수군 만호 배치
시행 시기/일시 1403년 - 내이포 수군 처치사 배치
시행 시기/일시 1425년 - 내이포 만호 부만호로 차강
시행 시기/일시 1496년 - 내이포 만호 도만호로 차강
시행 시기/일시 1544년 - 내이포 만호로 차강
폐지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내이포 만호진 혁파
성격 무관
품계 종4품

[정의]

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에 있었던 내이포[제포] 수군을 관할하던 종 4품의 무관.

[개설]

웅천의 내이포진은 왜구 침략의 요충지인 웅천현 남쪽 5리 지점에 설치되었다.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1인 배치되어 조선 시대 수군 진을 관할하면서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왜구들을 방비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삼국 시대부터 있었던 왜구의 노략질은 고려 중기 이후에 극성에 이르러 1390년(공양왕2)에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 등 3도의 연해 요해처에 수군 만호진을 설진하여 3도의 수군을 정비할 때 진해[웅천] 제덕동 안지개에도 수군 만호진이 설진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들이 준동하여 이 지역 안보가 위협 받음에 따라 1486년(성종 17)에는 내이포에 성을 쌓아 방어력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담당 직무]

만호는 종 4품의 외직 무관으로서 각 처 포·진의 수군을 직접 지휘 감독하는 실질적인 수장이었으나 지휘 체계 상 수군 절도사와 첨절제사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 따라서 만호는 항상 해상 방어에 임하였고 병선·화통·화약 등을 정비하였으며, 진포의 회계·물품 출납의 책임을 지고 해상의 기상 변화를 기록하였다.

내이포 만호진으로 차강된 이후 만호를 수장으로 하여 그 아래 진리 10인, 지인 7인, 사령 4인이 편성되었다. 군선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배치되어 있었고, 거북선 1척이 더 배치된 적도 있었다.

[관련 기록]

『신증 동국 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내이포 만호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다.

[변천]

1398년(태조 7)에는 내이포 수군 만호진이 도만호로 승격되어 경상 우도 수군도안무처치사[뒤에 수군첨절제사로 개칭]를 두는 거진[경상 우수영]이 되어 휘하 8개 만호를 관령하였다. 즉 안골포·사량·당포·영등포·옥포·조라포·평산포·적량 등을 관할하였으나, 뒤에 절제사영이 부산 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수군 만호가 남게 되었다. 1403년(태종 3)에는 수군 처치사를 두었다.

한편 교린 정책으로 1407년(태종 7)에 내이포를 개항하여 합법적인 무역을 허가하여 주었으나 왜인들은 무역하러 왔다가는 왜구로 돌변하고 왜구로 침입하였다가도 무역선으로 위장하는 등 불법 입주자는 늘고 노략질도 여전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방관할 수 없어서 1419년(세종 1)에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치게 하고 우수영을 보다 전방인 거제도의 오아포로 이진하였으며, 왜와 통교를 단절하였다. 1425년에는 파하여 부만호로 차강하였다.

통교를 단절하자 곤궁해진 대마도주가 귀순해 와 1423년에 다시 개항을 해주고 1437년에는 웅신현을 웅신진으로 변경하면서 우수영을 다시 옮겨 왔다. 1443년에는 계해조약을 맺어 은전을 베풀었으나 위약을 하고 노략질이 여전하였다. 그러다가 내이포의 우수영 지휘관을 1466년(세조 12)에 절제사로 차강하였다. 1486년(성종 17)에 안골포에도 수군진을 두고 제포진에는 석성을 쌓아 대비하면서 단속을 강화하였다. 1496년(연산 2)에는 도만호로 차강하였다. 당시에는 유군 병선이 11척, 소기군 1,600명, 무군 병선 5척이 있었다.

한편으로 왜인들은 성 밖에 거주하도록 제한된 장소를 왜관(倭館)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우리나라 관원들과의 마찰이 잦았다. 그러던 중 대마도주가 이끄는 왜인이 1510년(중종 5)에 삼포왜란을 일으켜 제포진과 웅천현성을 함락하고 민가를 분탕질하여 우수영을 다시 영등포로 이진하였다. 2년 뒤에 대마도주가 사죄를 해와 임신약조를 새로이 맺고 우수영을 다시 옮겨왔으나 1541년에 또 다시 왜인이 난동을 일으켰다. 왜구들이 섬이 많은 지형을 이용하여 출입을 하므로 3년 뒤에 보다 전방인 가덕도로 거진을 옮기고 제포는 만호진으로 차강되어 구한말까지 존속하였다.

유적으로는 경상 우도 수군첨절제사 진영의 터, 만호 탁유상 선정비[1705년 건립], 안응규 기념비[1938년 건립], 제포 왜관지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진해 제포 성지[경상남도 기념물 제184호]가 있다.

[의의와 평가]

내이포[제포]는 조선 시대 웅천[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었던 교역항인데 왜구들의 거주지와 침탈지로서 우여곡절을 겪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에는 한때 경상 우수영의 기능을 수행할 정도로 연변 방어에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였으며, 1541년 이후 만호진으로 차강하여 수군 만호가 지휘하면서 구한말까지 이어져 왔다. 따라서 이곳을 지키는 수군 만호의 역할은 다른 어느 지역 보다 해상 안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웅천의 관문으로서 그 위상을 유지한 곳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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