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36 |
---|---|
한자 | 栗院 戰鬪 |
영어공식명칭 | Yulwon Batt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598년 3월 24일 - 율원 전투 발생 |
---|---|
종결 시기/일시 | 1598년 3월 25일 - 율원 전투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경상도 삼가현 율원 -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
종결 장소 | 경상도 삼가현 -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정기룡|해생|시마즈 요시히로 |
[정의]
임진왜란 중인 1598년 3월 24~25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정기룡이 이끄는 조선군이 경상도 삼가현 율원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
[개설]
율원(栗院)은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에 소재한 역원(驛院) 중 하나로,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일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이후 경상도와 전라도를 공략 중이던 일본군은 1598년(선조 31) 삼가현 율원에서 분탕질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 정기룡(鄭起龍)이 율원으로 출병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게 된다.
[역사적 배경]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났는데, 1592년과는 달리 일본군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순차적으로 유린하였다. 그러나 이순신(李舜臣)의 명량 대첩(鳴梁大捷)과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북진했던 일본군이 남쪽으로 서서히 물러가게 되었다. 1598년으로 접어들자 경상도의 성주(星州)와 고령(高靈) 지역까지 수복하였으나, 여전히 경상 우도 일대는 일분군의 분탕질로 인한 피해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특히 사천(泗川)에 본진을 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휘하 일본군의 분탕질이 극심하였다.
당시 조명 연합군은 경상 우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 정기룡이 경상도 삼가현에, 명나라 부총관(副總兵) 해생(解生)은 합천군(陜川郡)에 각각 주둔하고 있었는데, 1598년 3월 24일 정기룡 막하에서 정탐하는 장수 이만성(李晩成)이 와서 삼가현의 율원에 일본군이 주둔 중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정기룡은 명나라 장수 해생과 함께 이들을 공격하게 된다.
[경과]
1598년 3월 24일 정기룡은 해생과 공동 작전을 전개하였다. 우선 정기룡은 선봉장 한명련(韓明璉)과 우후(虞侯) 박대수(朴大秀)로 하여금 삼가현 읍내에 군사를 매복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해생과 함께 율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날이 저물어 합천군 심묘리(心妙里)[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일대]에서 밤을 지내게 된다.
3월 25일 아침, 곧장 적진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미 삼가현 대평(大坪)[지금의 합천군 대병면 일대]으로 옮긴 후였다. 정기룡은 곧바로 일본군을 추격하여 공격하였는데, 일본군이 높은 산을 점거하고 있어서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에 정기룡과 해생은 군사를 물려 일본군을 평지로 유인하였고, 계획대로 일본군은 산을 내려와 삼가현 서문 밖에 진을 치게 된다. 그런데 삼가현 읍내에는 전날 정기룡의 명으로 한명련과 박대수가 매복 중이었다. 정기룡은 이들 군대와 곧바로 합세하였고, 군사를 좌·우로 나누어 공격해 일본군을 물리쳤다.
[결과]
율원 전투는 조명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정기룡은 율원 전투에서 일본군의 목 73개를 베었는데, 이를 모두 명나라 군대에 주었다. 또한 일본군에 사로잡힌 포로 100여 명을 구해 주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막바지 경상 우도 일대의 전황을 살펴볼 수 있는 전투이다.